유대인의 진로교육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을 당황하게 한 사건이 유투브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이 내·외신 기자회견을 마치고 한국기자에게 질문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주었다. 첫 번째, 두 번째, 무려 다섯 번의 기회를 주었으나 단 한명의 기자도 손을 들고 질문하지 않았다. 여섯 번째 중국기자가 손을 들고 질문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다시 한 번 한국기자의 질문을 기다렸다, 마침내 중국기자가 자신이 한국기자의 동의를 얻어 질문하겠다고 했으나 오바마 대통령은 영어를 잘 못하면 통역이 있으니 한국어로 질문해도 된다고도 했다. 그러나 단 한명의 한국 기자도 질문하지 않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혹시 한국 기자들이 영어를 못해서 질문을 못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면 질문할 소재가 없어서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두려움 때문일까? 소심해서 그럴까? 유투브 영상을 보면서 괜히 내 얼굴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받아온 교육의 결과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안타깝다. 어릴 적부터 나보다 강한 사람이나,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에게 궁금한 것을 당당하게 질문하지 못하고 오직 그들이 들려주는 말이 진리이며 전부인 양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해온 학습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네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라!’

유대인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토라와 쉐마”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히브리어로 ‘토라’는 모세오경을 말한다.‘쉐마’는 “듣는다, 들어라”라는 의미다. 유대인은 아이가 태어나 말을 시작할 때부터 부모들은 가장 먼저 ‘쉐마’의 첫 구절을 가르친다. 토라에는 분명히 ‘네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탈무드에는“만약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아이에게 토라를 가르치고, 쉐마를 암송 하게 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아버지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책임을 부과하고 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일은 하나님이 명령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대인 문화에서 아버지가 자녀를 가르치는 것은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전통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AD70년 로마제국의 침략을 받아 예루살렘이 점령당하면서 2천 년 동안 나라 없이 전 세계를 떠돌며 사는 신세가 되었다. 2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이나 전 세계에 흩어져 다른 나라 백성으로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이 고난의 세월을 보냈음에도 1948년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어떻게 그들의 옛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재건하여 오늘날 창조경제의 중심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흔히 종교의 힘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정복당하게 되면 가장 먼저 통제받는 것이 언론기관이고, 교육제도이며, 종교시설이고, 그 나라의 지식층 인재들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36년간 식민지배를 받았을 때도 가장 먼저 언론이 통제되고 날조되었고, 교육내용을 근본부터 바꿨다. 역사교육은 뿌리부터 말살 당하였고, 한글은 아예 쓰지 못하게 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 이른바 식민사관을 가르치며 과거의 전통과 역사, 문화를 바꾸며 민족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 먼저였다.

이스라엘에 비하면 36년은 짧은 기간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일제 잔재를 뿌리 뽑지 못하고 각 분야에서 60년이 넘도록 노력해도 그 폐해는 아직 남아 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오랜 기간인 2천년 동안이나 나라 없이 살았지만, 그들은 가정이라는 소중한 보금자리만은 지켜왔다. 학교도 없고, 선생님도 없었지만, 그들에게 가정은 성전이었고, 학교였다. 아버지는 교사였고, 랍비였고, 대제사장이었으며, 식탁은 예배드리는 재단이었다.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면서 한 주간에 있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질문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종교적 문제 뿐 아니라 일상적인 과제도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밥상머리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2천년 동안 이어져 이스라엘의 재건과 발전의 기틀이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 정체성의 핵심에는 부모가 있었다. 특히 아버지의 역할이 매우 컸다. 유대인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대단히 중요하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마음의 기둥이며 버팀목이다.

한편 아버지는 가정에서 아이들과 대화하는 하브루타(짝)가 된다. 때문에 서로 거리낌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다. 유대인의 삶의 지침이 되는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치는 사람 역시 아버지다. 유대인 아버지는 항상 자녀들에게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고 아버지가 책 읽는 모습을 아이가 어릴 때부터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와 같이 유대인에게 가장 훌륭한 스승은 학교 선생님도 학원선생님도, 종교 지도자인 랍비도 아닌 그들의 부모님이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통해 조상들이 겪은 고난의 역사와 전통과 가족 문화를 익히며 배운다. 이러한 영성(靈性)과 인성(人性)교육이 바탕이 되니 자녀와의 소통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문제가 있으면 곧 바로 질문과 토론으로 이어져 해결방안을 찾는다. 혼자서 고민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교육의 전부가 아니다. 어떻게 배울 것인가 하는 방법까지도 가르쳐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일정한 양식의 지식을 아이들의 머릿속에 넣어주고, 시험문제를 잘 푸는 요령과 기술을 배우기를 원한다.

학교나 학원 심지어 가정에서도“잘 듣고, 외우고, 시험 잘 보도록”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전부인 양 믿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꿈도, 부모님들의 꿈도 좋은 학교에 진학하여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되었다. 꿈 너머 꿈에는 관심도 없는 것인가?


이제는 바꿔야 한다.

이제 아이들이 무비판적인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도록 교육 방법을 바꿔야 할 것이다. 교육인프라, 부모의 열정, 교육제도 등 모든 여건은 이미 다 준비되어 있다. 아이들의 말문만 트면 된다.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당당하게 질문하는 방법만 가르치면 된다.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가진 호기심의 싹을 키워주자. 학교에서는 환경을 조성하여 질문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자. 선생님의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질문하고 토론하며 참여하여 논쟁을 통하여 협상하며 결과에 순응하는 자세”를 배우도록 학습 분위기를 만들어주자.

더 이상“잘 듣고 외우고 시험보고 잊어버리는 교육”이 아니라 질문과 대화, 토론을 통하여 스스로 비판적 사고를 기를 수 있는 학습이 필요하다.

세월호의 아픔이 우리에게 깨우치고 요구하는 것을 잊지 말자. 직업윤리, 기업윤리, 직업관, 기업가정신은 학교교육을 통하여 배워야 할 교육적 덕목이다. 300명이 넘는 인명이 희생되었음에도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제2의 세월호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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