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처단, 단 한 명도 못했다고? 
-친일 청산, 못한 이유는 뭘까?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의 두 얼굴 
-독립군 토벌했던 백선엽 장군, 현충원 안장 논란 
-거침없는 프랑스·독일의 반역자 처벌 

*사진 출처=클립아트코리아
*사진 출처=클립아트코리아

이번 기사는 지난 1편(클릭)에 이어집니다. 아직 1편을 보지 못하셨다면 함께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8월 15일은 75주년 광복절! 35년이나 되는 일제의 무력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에요. 광복 후 우리는 특유의 성실성과 지혜를 발휘해 이 땅을 기술 강국, 문화 강국으로 훌륭히 키워냈지요. 헉! 그런데 한 가지, 아직도 해결 못한 숙제가 있대요. 35년간 우리 민족을 괴롭혔던 일제의 그림자가 우리 사회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톡톡>이 들려드립니다. 우리는 모르고  지나쳤던, 광복을 둘러싼 슬프고 아픈 이야기들을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지요. 이 말처럼 역사가 남긴 숙제를 잊지 않고 풀어야만, 다시는 같은 아픔을 겪는 일이 없을 거예요. 여러분도 광복의 소중한 의미를 지키는 데 함께해 주세요! 

-이 기사는 <톡톡> 8월호 '커버스토리'에 12p분량으로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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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기만 좋아하는 우리 아이, '책'과 놀게 할 수는 없을까? 재밌는 잡지를 읽었더니 두꺼운 책도 술술 읽혀요! 독서능력이 쑥쑥! 다양한 분야에 걸친 흥미로운 기사로 아이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톡톡으로 내 안에 숨은 잠재력을 깨워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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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남아있는 친일의 그림자 

친일파 처단, 단 한 명도 못했다고? 

반민특위는 시민들로부터친일파 제보를 받기 위해 투서함을 만들었다
반민특위는 시민들로부터 친일파 제보를 받기 위해 투서함을 만들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가난 대물림으로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우선 누구를 친일파라고 하는지부터 알아봅시다. 

1948년 제정된 ‘반민족행위 처벌법’은 그 대상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가려놓았어요. 일본 정부와 협력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독립군을 살상·박해한 자, 일본군, 일본경찰, 일본 헌병, 민족주의 정신과 신념을 배신하고 반민족 언론과 글 쓰기, 기타 방법으로 지도한 자 등이 해당합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 치하에서 학교를 다니며 일본말을 쓰고, 일하고 세금을 내야 했던 사람들은 애초에 친일파라고 하지 않은 거죠. 출세해서 편하게 살겠다는 이기심으로 동족을 죽이거나 괴롭히며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만을 친일파라고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광복 직후 국가로부터 처벌을 받은 친일파는 몇 명이나 될까요? 놀라지마세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정부 수립 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만들어 친일파를 체포하고 조사했습니다. 

반민특위는 559명의 친일파를 검찰에 넘겼는데, 검찰은 이 중 221명만을 기소했고 그 중에서도 41명에게만 구형했어요. 이 마저도 모두 무죄나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구형 | 형사 재판에서, 피고인에게 어떤 형벌을 줄 것을 검사가 판사에게 요구함 

친일 청산, 못한 이유는 뭘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해방 직후에 친일 청산을 하지 못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있어요.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우리나라를 통치했던 미군정은 ‘구관이 명관’이라며 친일파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의 중요한 자리에 앉혔어요.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의 지주였던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친일파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끌어안았죠. 기세등등해진 친일파 관료와 경찰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막강한 힘을 등에 업고 반민특위 요원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탄압하고 고문했어요. 이를 말리는 검찰 총장의 가슴에 총구를 들이대기까지 했죠. 

거기다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를 탄생시킨 국회의원들까지도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어요. 민족의 열망으로 탄생한 반민특위는 힘없이 스러지고 말았죠. 

일제 순사에서 대한민국 경찰로 이름표만 바꿔 단 친일파들에게는 독립운동가들이 눈엣가시였어요.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에게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워 고문하고 죽였어요. 이렇게 친일파 처단은 물거품이 된 채로 지금에 이르게 된 겁니다. 

친일파의 그림자는 지금도 사회 곳곳에 짙게 남아있어요. 서울대에는 작곡가 현재명의 동상이, 연세대와 고려대에는 각각 백낙준과 김성수의 동상이 서 있어요. 이들은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 학도병이 되어 태평양 전쟁에 지원하라고 선동한 사람들이에요.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할 대학교에 버젓이 친일파의 동상이 서있는 것은 친일파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힘이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이겠죠.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의 두 얼굴 
우리 삶에 침투한 친일의 그림자는 의외의 곳에서도 발견되고 있어요. 국가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부르는 애국가가 그렇습니다.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가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라 있는 유명한 친일변절자이기 때문이죠. 

안익태는 1935년경 미국에서 ‘애국가’를 초연할 당시만 해도 “우리 민족운동과 애국정신을 돕는 데 대단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어요. 

하지만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유학하던 안익태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행동이 돌변합니다. 일제 첩보원의 독일 집에서 함께 살며 일본과 독일을 위한 작곡과 연주 활동에 매진했어요. 

그는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일제의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을 찬양하는 <만주국 환상곡>을 작곡합니다. 그리고 <만주국 환상곡> <일본 축전곡> 등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음악들을 일제와 나치 독일을 위해 연주했습니다. 

10여 년 전 이 같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친일반역자가 만든 애국가를 국가(國歌)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관행적으로 안익태의 애국가를 국가로 불러 왔지만, 애국가가 법으로서 대한민국의 국가로 정해진 적은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1960년대부터 감상적인 멜로디나 가사 등에 문제가 있다며, 안익태의 애국가 대신 새로운 애국가를 국가로 만들자는 주장이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올해 광복절에도 애국가 논란은 다시 지펴질 텐데요. 우리의 친일 청산, 과연 언제쯤 가능할까요? 

*사진 출처=news.sbs.co.kr
*사진 출처=news.sbs.co.kr

독립군 토벌했던 백선엽 장군, 현충원 안장 논란 

*간도특설대 간부들 [사진 출처=서해문집]
*간도특설대 간부들
[사진 출처=서해문집]

‘간도특설대’는 일제가 조선인의 손으로 조선인을 죽이게 하려는 간악한 의도를 가지고 만든 부대입니다. 이 때문에 간도특설대에 속한 국인은 대부분이 친일 조선인이었어요. 

조선인의 몸으로 일본군이 된 그들은 중국에서 활동 중이던 독립운동가들을 혹독하게 탄압했습니다. 

이런 간도특설부대에, 그것도 스스로 지원해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백선엽 장군이 7월 10일 사망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친일반역 행위에 대한 사과나 반성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조선인을 죽인것은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 장군의 모습[사진 출처=AFP]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 장군의 모습 

그의 유해는 15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는데요.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백 장군의 현충원 안장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현충원 안장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가 한국전쟁 당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공을 인정해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공적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사실은 과장되거나 왜곡됐다고 반박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서울과 대전의 현충원에는 백 장군 외에도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68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묻혀 있습니다. 하지만 현행법으로는 아무리 악독한 친일파라고 해도 현충원 안장 자격을 갖춘 경우에는 이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됐다면, 그래서 친일반역자들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고 진심으로 사죄했다면, 처음부터 이런 논란은 생기지 않았을 거예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사회는 현재와 미래에도 과거의 불행을 반복해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침없는 프랑스·독일의 반역자 처벌 
프랑스는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점령당한 아픔이 있거든요. 하지만 반역자들에 대한 처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면 우리와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프랑스는 4년 2개월의 나치 점령 기간 동안 나치에 협력한 자들을 적극적으로 잡아내 법정에 세웠어요. 독일로부터 해방된 이후 총 5만 5,331건의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이중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만 6,763명이나 됐고, 767명에게는 실제 사형을 집행했어요. 재판소가 설치되기 전 즉결 처형된 사람까지 포함하면 총 1만2천여 명을 처단했다고 해요. 

재판소에서 다룬 나치 부역자 사건은 총 12만4,751건에 달했습니다. 처벌 대상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와 대기업 총수, 유명 작가들도 예외가 되지 못했어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인 만큼 오히려 더욱 가혹한 처벌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는 사회 곳곳에 숨어 있던 나치의 그림자를 깨끗이 걷어낼 수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인 독일 은 어떨까요? 독일의 나치 부역자 처벌은 프랑스보다 더욱 엄격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실 독일은 전쟁이 끝난 직후 유대인 학살에 직접 가담한 자들만을 처벌했어요. 

하지만 2011년 법원이 강제수용소 전직 경비병에게 금고 5년형을 내리면서, 강제수용소 경비병으로 활동한 것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어요.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을 방조하고 도운 것 역시 씻을 수 없는 죄라는 것이죠. 

부역자(附逆者) |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사람 

*에듀진 기사 URL: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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