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증오에 가득 찬 비방의 대상이 되었는가

역사는 어느 의미에선 ‘승자의 기록’일 뿐이다. 이긴 자들이 살아남아 패배한 자들의 역사를 지워버리거나 뒤틀어버리곤 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존속해오는 동안 이런 식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라지거나 왜곡된 진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여기 한 인물이 있다. 비록 패배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그의 조국이 숭상하던 태양처럼 너무나도 강렬한 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패배했기에… 승자쪽의 역사가 끊임없이 자신을 왜곡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주인공을 둘러싼 진실과 오해는 지난 2천년 동안 빛과 어둠처럼, 해와 달처럼 극적으로 갈라져왔다.

로마 옥타비아누스의 적개심
“야심에 찬 탐욕스러운 여왕은 자신의 혈육을 남김없이 잔인하게 살해한 뒤 그 분노를 외국인에게 돌렸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품에 안긴 채 가장 훌륭한 이들을 모략하고 죽이도록 해서 그들의 유품을 횡령했다.”(AD 1세기.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모두가 확신하는 그의 연인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뿐이다. 당시 로마 여인들의 난잡한 생활과 비교해본다면 그 둘은 결코 많은 수가 아니다. 게다가 그 관계는 정식으로 인정된 것이었다.”(BC 1세기. 수에토니우스)

“아름답지만 탐욕스럽고 뻔뻔한 여왕에게서 이집트 왕조의 모든 악덕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울 바가 없다. 해로운 나뭇가지 끝에 독을 품은 꽃이 피듯 그는 라지드 왕가의 마지막 영예이자 오점인 것이다.”(1904년. 부세 르클레르)

“이집트에서는 그에 대한 기억이 빛나는 전설로 승화된다. 학자들은 그를 ‘이집트의 가장 사려깊은 여인’으로 칭송하고, 국민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거대한 기념관에서 그를 기린다.”(1990년. P. M. 마르탱)
 

   
▲ 알렉상드르 카바넬이 그린 클레오파트라. 그에겐 성적 매력과 사랑도 무기였다. <사진 제공=한겨레21>

클레오파트라!

왜 로마는 이 여성을 이토록 증오에 가득 차서 왜곡하고 비방했을까?

왜 로마는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세력 가운데 실질적인 주력군인 안토니우스 대신 클레오파트라를 겨냥해서 선전포고하는 방법을 선택했을까?

“역사상 가장 광활하고 비옥한 땅을 호령해온 우리 로마인이 한낱 이집트 여인에게 짓밟히고 멸시당한다면 조상을 뵐 낯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여인의 수중에서 농락당한다면 어찌 우리의 위대한 영웅들이 원한에 사무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원전 31년 클레오파트라와 적대하던 로마의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을 앞두고 이렇게 외쳤다고 로마의 역사가 카시우스는 전하고 있다.

이에 앞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베스타 신전에서 빼앗아와 원로원에서 공개했다. 그런 방식은 로마에선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범죄적 행위였다. 이어서 그는 초기 로마의 전통의상 차림으로 군신 마르스의 들판으로 나가 전쟁의 여신 벨로나 신전에서 가져온 피묻은 창을 던진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안토니우스가 아닌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하는 방식을 취한다.

치밀한 각본에 따라 연출되는 것처럼 전쟁으로 치닫는 발전과정을 자세히 보면 하나의 집요한 이데올로기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로마=남성’이라는 논리다. 자연히 그 반대편에 서는 것은 ‘이집트=여성’이라는 논리가 될 수밖에 없다. 후세의 역사가가 어떻게 파악하건 이 전쟁의 한쪽 당사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을 ‘로마 대 이집트의 전쟁’이자 ‘남성 대 여성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의미에선 역대 로마 황제 가운데 가장 영특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옥타비아누스(훗날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진실로 라이벌 의식을 느꼈던 것은 자신보다 군사적 경험이나 행정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원전 31년 9월 악티움에는 이런 운명적 전쟁의 승부를 가리기 위해 일찍이 보기 어려운 대군이 대치했다. 안토니우스 진영은 500척의 군함에 7만명의 병력을, 옥타비아누스 진영은 400척의 군함에 8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클레오파트라는 200척의 배를 안토니우스에게 지원하고 있었고, 엄청난 금과 은 그리고 보석으로 이뤄진 이집트의 군자금을 배에 싣고 전장에 출전하고 있었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대리석상(오른쪽).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이자 강력한 후원자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대리석상(왼쪽).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그는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뒤 자살한다. <사진 제공=한겨레21>

카이사르·안토니우스와의 사랑
이 운명적 대결의 전장에 이르기까지 클레오파트라는 크고 작은 난관을 헤쳐나와야 했다. 그 생애를 보자.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그 이전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공주가 태어나면 클레오파트라라는 그리스식 이름을 붙인 사례가 많다. 따라서 그는 클레오파트라 7세라고 불린다. (그의 언니 중에 클레오파트라 6세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자녀가 6명 있었기에 후계를 둘러싸고 갈등과 암투가 심했다. 동시에 왕국은 유럽에서 새롭게 세력을 확장해 이집트까지 밀려오는 로마의 영향력 앞에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왕국은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침내 18살 때 파라오에 오를 수 있었다. 관습에 따라 10살 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해 공동으로 통치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친로마정책을 취한 데 대한 반작용으로 점차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세력으로부터 인심을 잃어 고립된다. 결국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야 했다.

사실상의 국내 망명생활은 로마의 새로운 실력자 카이사르가 경쟁자 폼페이우스를 추격해 이집트까지 들어오는 상황에 따라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카이사르와의 협상을 모색하고 그 과정에서 카이사르와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카이사르의 지원으로 다시 파라오 자리에 복귀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견제하던 궁정세력을 제압하고 이집트의 중흥을 꾀했다.

그 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와 로마의 지배자로 만들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했다. 이집트의 부와 로마의 군사력으로 동서를 통일해 함께 다스리다가 아들 카이사리온에게 물려주려는 자신의 계획에 카이사르를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이런 계획의 일환으로 로마에 간 클레오파트라는 황제에 오르려던 카이사르가 뜻하지 않게 공화파에게 암살되는 사태를 맞게 된다. 이에 따라 이집트로 급히 돌아왔다.

이집트에서 로마 정정의 변화를 주시하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 암살세력을 쳐부수고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안토니우스와 연합하게 된다.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근위대 대장 출신인 레피두스 세 사람으로 이뤄진 제2차 삼두정치에 들어간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남녀 쌍둥이를 낳고 3년 뒤 안토니우스와 결혼한다. 이와 함께 안토니우스에게 군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시리아와 페니키아 해안의 부유한 도시들, 살리시아 해안의 일부, 유대의 해안지역 등 과거 이집트 전성시대의 소유 영토 대부분을 할양받는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원정을 성공시키고 돌아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서 중요한 의식을 거행한다. 클레오파트라를 ‘왕 중의 여왕’, 그리고 카이사리온을 ‘왕 중의 왕’으로 선포하면서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적출자’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조치는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스스로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공언하던 옥타비아누스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 독사를 이용해 자살하는 클레오파트라. 이집트 여신 이시스의 화신인 뱀을 통해 영생으로 들어가는 의식을 재현한 셈이다. <사진 제공=한겨레21>

로마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신들을 지배할 계획임을 알고 급격하게 반안토니우스-반클레오파트라 분위기로 전환했다.

결국 세력 확장에 나선 옥타비아누스군과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그리스 서부 해안 악티움에서 최후 결전을 벌이게 된다. 강력한 부권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신흥세력 로마냐? 아니면 오랜 역사를 이어오는 모권과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전통세력 이집트냐?

야망의 스케일이 컸다, 찬스에 강했다
도대체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어떤 강점이 있기에 여기에 이른 것일까?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야망의 스케일이 컸다. 그가 후반 생애에서 전심을 다해 추구한 것은 아들 카이사리온의 세계 지배라고 할 수 있다.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로 인정받아 이집트뿐만 아니라 로마까지 지배하는 꿈…. 실제로 이 꿈은 악티움 해전 직전까지 현실화될 가능성을 안은 채 전진해나간다.

2. 찬스에 강했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베팅한다. 로마의 실력자 카이사르와 인맥을 구축하고 파라오 재등극을 위한 계기를 잡으려 실제 그는 결정적 장면을 연출한다. 잠재적 암살자나 밀고자들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양탄자로 몸을 만 채 그야말로 영화처럼 카이사르의 숙소에 잠입하는 것이다.

3. 무엇보다 총력전의 화신이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무기다. 성적 매력이라든가 사랑도 무기로 동원된다. 또 남성은 전쟁에서 이겨 전리품만을 갖지만, 여성은 자식을 낳음으로써 미래를 장악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활용했다.

4. 외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깊이 알았다. 로마를 잡으면 승리한다는 것을 깨닫고, 로마를 통해 완전한 승리를 꿈꿨다. 10개 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어 능력과 해박한 교양도 모두 이런 외교전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5. 이집트의 마음을 읽었다. 그리스의 마케도니아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인간들은 사실상 이집트어를 배우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이 언어를 배웠다. 나아가 어느 왕족보다도 알렉산드리아 왕궁 밖에 사는 800만에 이르는 비그리스계 이집트인들을 이해하고 싶어했다. 바로 이것이 클레오파트라를 영원히 사는 길로 이끌게 된다.

6. 통치능력이 뛰어났다. 이집트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금화가치를 3분의 1로 격하해 수출 증대를 도모하는가 하면, 의무공채를 발행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경제도 잘 알았던 셈이다.

클레오파트라의 꿈은, 여성의 꿈은 결국 실패한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패배했던 것이다. 남성성과 부권, 그리고 군사력의 세계가 이긴 것이다. 아니, 여성성과 모권 그리고 문화가 패배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 표현이 세계사적으로 더 정확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감금된 숙소에 몰래 들여온 독사를 이용해 자살했다. 이집트 여신 이시스의 화신인 뱀을 통해 영생으로 들어가는 의식을 재현한 셈이다. 그 뒤 2천년, 클레오파트라의 꿈은 아직껏 실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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