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강력한 왕권의 상징, 불멸의 초상화 '어진'
[미술산책] 강력한 왕권의 상징, 불멸의 초상화 '어진'
  • 송미경 기자
  • 승인 2019.09.03 10: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시대 '어진'을 만나다!

조선은 중앙집권국가로, 전 국토와 백성이 국왕의 다스림을 받았다. 고려도 전제왕권과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조선의 왕은 이보다 더 강한 왕권을 가졌기에 왕에 대한 상징성도 그만큼 강했다.

임금의 옥체는 그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었으며 임금이 입고, 먹는 것들은 모두 최상품이었다. 백성들은 그런 임금의 용안을 감히 알 수 없었으며 마주 본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왕의 얼굴을 생생히 기록해 놓은 유일한 그림이 있다. 바로 왕의 초상화 ‘어진(御眞)’이다. 조선시대의 어진은 단순히 왕의 얼굴을 그린 것을 넘어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했다.

터럭 한 올까지 섬세하게 그려진 어진을 보면 마치 당시를 풍미했던 왕이 살아 돌아온 듯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강력한 왕권의 상징, 조선시대 어진을 감상해 보자.

-이 기사는 <나침반 36.5도> 매거진 8월호 74p에 4p분량으로 실린 내용입니다. 
-전체 기사 내용이 궁금하다면 '나침반 36.5도 '정기구독'을 신청하세요.

경쟁력 있는 나만의 학생부 만드는 비법이 매달 손안에 들어온다면? 학종 인재로 가는 길잡이 나침반 36.5도와 함께라면 가능합니다. 매달 선명해지는 대입로드를 직접 확인하세요!

▼ <나침반 36.5도> 정기구독 신청

대학 길잡이 '나침반 36.5도' 정기구독 신청 클릭!
대학 길잡이 '나침반 36.5도' 정기구독 신청 클릭!

조선 화가 최고의 영예 '어진화사'
어진이 단순 초상화가 아닌 만큼 이를 그리는 데는 조선 최고의 화원들이 동원됐다. 주로 대신들의 추천을 받은 국가 직속 관청 도화서 화원들이 그렸다. 마땅한 사람이 없을 때는 민간에서 사람을 뽑아 그리게 하기도 했다.

어진화사는 용안을 중심으로 섬세한 밑그림을 그리는 ‘주관화사’, 다소 중요하지 않은 왕의 신체나 의복을 그리는 ‘동참화사’,배경을 그리거나 보조를 맡는 ‘수종화사’로 나뉜다. 어진 제작에 참여하는 이들은 어진화사 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조정의 신하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에 참여해 논의하고 조언을 하는 등 작품 제작에 공을 들였다.
 

▲ 시도유형문화제 제220호 고종 황제 어진
[사진 출처=wikipedia]

극도의 사실주의 기법으로 제작
조선시대에는 ‘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극도의 사실적인 초상화를 추구했다. 눈 모양, 점의 위치는 물론이고 피부병 자국, 눈썹과 머리카락 한 올까지 사진을 찍듯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낱낱이 기록했다.

어진 제작에 세 번이나 참여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단원 김홍도도 세 번 모두 동참화사에만 머물렀다. 그 정도로 어진화사 가운데 단연 으뜸인 주관화사는 개성 있는 화풍보다 관찰력과 묘사력이 매우 뛰어난 이들을 가려 선발했다.

어진은 기름먹인 종이에 목탄과 먹을 이용해 스케치하는 밑그림인 초본을 우선 만든다. 초본이 완성되면 그 위에 비단 화폭을 덮고 비단에 비치는 종이의 밑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린다.

비단 위에 옮겨진 그림에 채색을 하면 어진은 완성된다. 어진화사들은 외모를 똑같이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임금의 성격과 기질까지 표현한 전신사조의 정신도 잊지 않았다.
 

▲ 보물 제1492호 철종어진 [사진 출처=wikipedia]

화마가 앗아간 왕의 얼굴
조선의 역대 임금 27명 가운데 얼굴을 알 수 있는 사람은 태조, 세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 6명뿐이다. 5개의 어진 가운데 실물을 직접 보고 그린 ‘도사본’은 영조의 어린 시
절을 그린 연잉군 어진밖에 없고, 나머지는 1850년대 이후에 원본을 보고 따라 그린 ‘
이모본’이다(세조 어진은 초본).

6명의 왕을 제외하고 지금 우리가 얼굴을 아는 왕은 모두 후세가 상상해 그린 ‘추사본’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해 세계 최대 규모의 기록유산이라 불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유한 조선이 왜 어진은 단 몇 점밖에 남기지 못한 걸까. 이유는 바로 ‘화재’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때 궁궐이 불타면서 많은 어진이 손상되거나 소실됐다. 이후 6·25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1954년, 부산의 피란민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 근처에 어진을 포함한 약4,000여 점의 문화재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는데 이곳에 대형 화재가 발생해 대부분의 어진이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다.

불에 타버린 왕의 얼굴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돌이킬 수 없는 모습에 상실감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화마로 인해 어진은 소실되었을지언정 우리 시대의 혼마저 앗아갈 수는 없었다.

남아 있는 어진과 어진 제작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의궤, 높은 수준으로 제작돼 전해져 오는 사대부들의 초상 등이 남아 조선 왕조의 어진을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불멸의 초상화’로 남게 했다.

■ <나침반 36.5도> 8월호 해당 페이지 안내 

*사진 설명: 국보 제317호 조선 태조 어진 [사진 출처=문화재청]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60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법인명 : (주)36.5커뮤니케이션즈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호수로 662 삼성라끄빌 426호
  • 대표전화 : 070-4218-935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동우
  • 제호 : 에듀진 인터넷 교육신문
  • 등록번호 : 경기 아 51057
  • 등록일 : 2014-11-26
  • 발행일 : 2014-11-26
  • 발행인 : 신동우
  • 편집인 : 신동우
  • 에듀진 인터넷 교육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9 에듀진 인터넷 교육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edujin.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