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레노스, 생리학 체계를 정맥·동맥·신경으로 나누다
-해부학이 발달하며 갈레노스의 이론이 흔들리다
-하비, 혈액 순환을 실험으로 증명하다
-혈액 순환 이론에 영향을 준 이론들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에 비하면 우리가 아는 것은 엄청나게 적다.  - 윌리엄 하비 -

갈레노스, 생리학 체계를 정맥·동맥·신경으로 나누다  
《히포크라테스 전집》과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잘 알려져 있는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기원전 460?~기원전 370?)는 인체의 기능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4체액설’을 주장했다. 4체액설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이라는 4종류의 체액으로 구성된다. 체액들 사이의 균형이 잘 맞으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지만, 체액이 넘치거나 모자라면 질병이 발생한다.

네 체액은 각각 따뜻함, 차가움, 습함, 건조함이라는 성질과 연결되는데, 계절에 따라 우세를 점하는 체액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차가운 성질을 지닌 점액은 겨울에 양이 증가한다. 그래서 겨울철에는 점액 관련 질환에 잘 걸린다.

반면 봄에는 축축하고 따뜻한 혈액의 양이 증가하기 때문에 혈액과 관련된 질환이 생기기 쉽다. 히포크라테스는 계절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기후, 음식, 공기, 물, 운동 등도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히포크라테스에게 질병 치료의 목적은 체액의 균형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는 체액이 부족할 때는 식단 조절이나 운동을 통해 체액을 보충하고, 반대로 체액이 넘칠 때는 피를 뽑거나 먹은 것을 토하거나 배변 활동을 해서 체액을 몸 밖으로 빼내면 질병이 치료된다고 믿었다.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설명하려고 한 고대 이론가 중에서 영향력이 가장 오래간 사람은 히포크라테스보다 약 5세기 뒤에 활동했던 클라우디우스 갈레노스(Claudius 
Gale-nus, 129~199?)이다. 

갈레노스의 생리학은 히포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4가지 액체가 결합해 조직, 기관, 그리고 신체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갈레노스의 체액설이 히포크라테스의 체액설과 다른 점은 질병의 원인을 체액에서만 찾지 않았다는 점이다. 갈레노스는 질병의 원인을 2가지로 보았는데, 하나는 각 액체의 불균형이고, 다른 하나는 신체 각 기관의 고장이다.

따라서 갈레노스는 각 기관의 구조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해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만 로마에서는 인체 해부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갈레노스는 동물을 해부해 인체 구조를 이해해야 했다.

갈레노스의 생리학 체계는 그의 해부 이론 이상으로 중요하다. 갈레노스는 플라톤의 이론을 받아들여 ‘3기관 3영혼설’이라는 독특한 생리학 체계를 완성했다. 3기관은 뇌, 심장, 간이고, 각 기관은 각각 동물의 영, 생명의 영, 자연의 영과 연결된다는 이론이었다.

3기관 3영혼설이라는 이름에서처럼 갈레노스의 생리학 체계는 정맥, 동맥, 신경 3개의 체계로 나뉜다. 서로 다른 3개의 영은 각각 다른 체계를 움직였으며, 소화, 호흡, 신경 체계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3기관 3영혼설은 중세를 거쳐 근대 초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생리학 체계로 자리를 지켰다. 그의 생리학 체계는 매우 정교했고 실제 해부 결과를 어느 정도 반영했기 때문이다.

*3기관 3영혼설
*3기관 3영혼설

갈레노스는 심장이나 간과 같은 각 기관이 모두 각자의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이 모두 신이 설계한 신성한 산물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종교적인 세계관에 아주 잘 맞았다. 종교와의 조화는 갈레노스 의학 체계가 오랫동안 의학 교육을 지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갈레노스의 돼지 해부 : 돼지를 해부하고 있는 갈레노스의 모습. 당시 로마에서는 인체 해부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갈레노스는 돼지나 원숭이를 해부해 인체를 이해하려고 했다.
*갈레노스의 돼지 해부 : 돼지를 해부하고 있는 갈레노스의 모습. 당시 로마에서는 인체 해부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갈레노스는 돼지나 원숭이를 해부해 인체를 이해하려고 했다.

해부학이 발달하며 갈레노스의 이론이 흔들리다  
과학 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갈레노스의 생리학 체계는 뿌리째 흔들렸다. 변화를 가져온 주인공은 의사이자 생리학자였던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학문의 변두리였던 영국에서 태어난 하비는 천 년 이상 정설로 받아들여진 갈레노스의 생리학 체계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논문에는 혈액이 매일 새로 만들어져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만들어진 혈액이 인체를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이론이 실려 있었다.

혈액 순환 이론 발표는 갈레노스의 의학을 근대적 의학으로 대체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하비의 새로운 생리학 체계는 그 이전까지 이루어진 여러 해부학적 발견들을 기초로 정립되었다. 하비가 태어나기 이전인 15세기까지 의대의 해부학 수업은 교수가 갈레노스의 해부학 지식을 하나씩 말하면 조수들이 인체를 해부하면서 그 이론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15세기를 지나면서 해부학 분야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연구자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부하는 것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부학에서 일어난 변화를 대표하는 예로 르네상스 시기의 인물인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를 들 수 있다.

다빈치는 총 30여 구의 시체를 해부하고 정교한 해부도를 그렸다. 르네상스 말 가장 유명한 해부학자인 벨기에 출신의 의사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는 증조부부터 아버지까지 모두 왕의 주치의를 지낸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해부 현장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1543년, 베살리우스의 인체 연구 결과를 담아 출판한 《인체 구조에 관하여》에서 그는 직접 인체를 해부해서 갈레노스 이론에 있는 오류를 200개 이상 찾아냈다고 밝혔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생리학 체계에서 오류를 많이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이론을 세우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기본적으로 해부를 할 때 갈레노스의 체계를 따라서 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여러 의사들이 갈레노스 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이해를 조금씩 높여 나갔다. 하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해부학자는 베살리우스의 제자이기도 했던 히에로니무스 파브리치우스 (Hieronymus Fabricius, 1537~1619) 일 것이다. 

하비가 파도바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 파브리치우스는 아주 중요한 발견을 했다. 바로 정맥에 있는 판막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었다. 파브리치우스는 팔을 끈으로 동여매면 판막이 있는 곳의 혈관이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보여 주었다. 판막이 혈액의 속도를 조절해 신체 각 부분에 혈액이 적절한 양만큼 공급되도록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판막의 발견은 혈액의 흐름에 관한 갈레노스의 이론을 깰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지만 정작 파브리치우스 자신은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하비는 판막의 중요성을 바로 알아챘다. 갈레노스는 간에서 생성된 혈액이 정맥을 따라서 인체 각 부분에 도달한다고 설명했지만, 하비가 보기에 판막은 피가 심장 쪽으로만 이동하도록, 즉 피가 역류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하비는 ‘판막이 있는 한 피가 정맥을 따라서 온몸으로 전달될 수는 없다.’라고 생각했고, 갈레노스의 이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빈치의 해부도 : 다빈치가 그린 인체 기관들이다. 인체를 직접 해부해 관찰하고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각 기관들이 정확하고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다빈치의 해부도 : 다빈치가 그린 인체 기관들이다. 인체를 직접 해부해 관찰하고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각 기관들이 정확하고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인체 구조에 관하여》의 삽화 : 베살리우스의 이 책에는 정교한 인체 해부도가 여럿 실려 있다.
*《인체 구조에 관하여》의 삽화 : 베살리우스의 이 책에는 정교한 인체 해부도가 여럿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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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혈액 순환을 실험으로 증명하다  
계속되는 실험을 통해 하비는 그 이전까지 사람들이 믿었던 것처럼 심장이 우심실과 좌심실 2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4개의 방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바로 우심방과 우심실, 좌심방과 좌심실이다.

또한 그는 각 심방과 심실이 각각 어느 혈관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냈으며, 이를 통해 폐순환 경로를 확인했다. 하비는 심장이 수축할 때 혈액이 심장을 나가고, 반대로 심장이 이완할 때 혈액이 심장 안으로 들어온다는 점도 알아냈으며, 동맥과 정맥의 차이점도 찾아냈다.

하비는 해부학적 성과들을 바탕으로 점차 갈레노스 이론이 틀렸다는 확신을 가졌다.마침내 하비는 1628년에 발표한 논문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에서 정맥 체계와 동맥 체계를 분리했던 갈레노스 체계를 완전히 거부했다.

대신 그는 혈액은 몸 전체를 순환하며, 동맥과 정맥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모여 하나의 거대한 순환 체계를 구성한다는 혁신적인 주장을 내세웠다.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에 따르면 좌심실이 뛰면서 혈액이 대동맥을 통해 온몸에 공급된다. 각 기관에 도달한 혈액은 갈레노스의 체계와는 달리 소모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대정맥을 통해 우심방으로 들어온다.

우심방의 피는 우심실로 가고, 우심실에서 폐동맥을 따라 폐로 간 다음, 폐에서 폐정맥을 통해 좌심방으로 돌아온다. 좌심방에서 피는 좌심실로 내려간 다음 다시 순환을 시작한다. 같은 혈액이 동맥과 정맥을 모두 통과하는 것이다.

*혈액 순환 이론
*혈액 순환 이론

하비는 자신의 이론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과학 연구 방법을 도입했다. 16~17세기 과학 혁명 시기의 과학 연구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이해하는 신플라톤주의, 인간이 자연과 소통함으로써 자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여긴 헤르메스주의, 그리고 자연의 신비한 힘을 인간을 위해 이용하려는 자연 마술의 영향을 받았다. 

낙하 속도와 이동 거리의 관계를 나타내는 공식처럼 자연 현상을 수학식으로 표현하는 현상도 이 시기에 등장했으며, 공기 펌프를 이용해 진공을 만드는 것처럼 환경을 통제해 지식을 생산하는 실험도 이 시기에 과학 연구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하비는 자신이 실험적 증거를 근거로 혈액 순환 이론을 만들어 냈다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는 판막이 혈액의 역류를 방지하고 혈액이 말단 정맥에서 심장 쪽으로 흐르게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혈관에 철사를 꽂아 철사가 한쪽 방향으로만 잘 들어가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였다.

또한 팔을 끈으로 묶은 다음 정맥 속에서는 혈액이 심장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을 직접 보여 주기도 했다. 또 혈액이 동맥에서 정맥으로 건너간 다음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도 고안했다.

하비의 논증에 있는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그가 정량적인 방법을 도입해서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폈다는 점이다. 하비는 혈액 순환 이론을 설명하면서 수학을 끌어들였다. 하비의 계산은 매우 단순했지만, 최초로 생리학에 수학적 계산 방식을 도입했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이 시도는 그의 이론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했다.

그의 혈액 순환 이론은 빠른 속도로 학자들에게 수용되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완전히 받아들여지는 데는 15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이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데는 3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혈액 순환 이론에 영향을 준 이론들  
하비는 어떤 사회적·학문적 영향을 받아서 혈액 순환 이론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실험과 정량적 사고방식을 중시하던 당시의 학문적 분위기 외에도 하비에게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는 당시에 널리 퍼져 있었던 기계적 철학이다. 기계적 철학자들은 자연을 시계와 같은 거대한 기계로 보았다.

이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존재가 물질과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의 모든 현상을 물질의 운동과 충돌로 설명하고자 했다. 과학 혁명 시기, 프랑스의 자연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기계적 철학을 크게 발달시켰다.

기계적 철학은 생리학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말의 많은 생리학자들은 기계적 철학자였다. 이탈리아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생리학자였던 조반니 알폰소 보렐리(Giovanni Alfonso Borelli, 1608~1679)를 그 대표자로 꼽을 수 있다. 생리학을 역학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보렐리는 인체를 이해하기 위해 기하학과 역학을 활용했다.

그는 심장은 압축기로, 뼈는 지렛대로, 근육은 탄성체로 보며 인체의 작동 원리를 기계처럼 설명하고자 했다. 보렐리에게는 인간의 소화 과정도 뭉개고 부수는 기계적인 과정이었다. 하비도 기계적 철학의 영향을 받아 심장의 작동을 펌프에 비유했다.

인체를 지렛대, 도르래, 체, 펌프 같은 기구에 빗대어 나타내는 기계적 철학의 설명 방식은 17세기 생리학자들이 인체의 기능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보렐리의 관절 삽화 : 기계적 철학자인 보렐리는 인체의 각 기관이 작동하는 원리를 기계에 빗대 설명했다
*보렐리의 관절 삽화 : 기계적 철학자인 보렐리는 인체의 각 기관이 작동하는 원리를 기계에 빗대 설명했다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 탄생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요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상학이었다. 하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순환 운동 개념에서 힌트를 얻어 심장에서 나간혈액이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는 원과 같은 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공기와 비가 천체의 회전 운동을 본뜬다고 말했던 것과 같은 의미에서” 혈액 순환 운동을 순환 운동이라고 불렀다. 하비는 정량적 사고 방법, 실험을 중시하는 경향, 기계적 철학 등 과학 혁명 당시의 학문적 변화를 자신의 혈액 순환 이론을 논증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하비가 가졌던 한계 또한 분명하다. 우선 그는 당시 학문적 분위기에 역행하는 고대·중세 과학의 대표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순환 개념을 차용했다. 또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된 목적론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목적론적 사고는 자연물의 구조와 생김새를 통해 그것이 만들어진 목적을 추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마지막은 혈액의 역할에 대한 그의 생각에 여전히 ‘정기’에 대한 자신의 관념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온몸을 돈 혈액이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스스로의 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이 외에도 온몸을 돌아 심장으로 들어온 혈액이 왜 폐에 갔다 와야 하는지, 또 폐를 돌아 나온 혈액은 왜 다른 부분의 혈액보다 더 선명한 붉은색을 띠는지 등의 의문을 해소할 방도가 없었다. 산소 개념은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이 확립되고 약 150년 후에야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비는 동맥을 통해 몸의 각 부분에 도착한 혈액이 어떻게 정맥으로 들어가는지도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또한 당시에는 아직 모세 혈관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은 근대적 생리학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철저한 관찰과 실험, 정량적 계산 방식, 합리적인 추론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비견될 정도로 근대 생리학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과학사학자들은 하비를 ‘생리학 혁명을 시작한 사람’으로 부른다.

*자료 제공=리베르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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