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의 미래는 어린이에게 있다” 
- 가난했던 어린 시절, 좌절하지 않고 공부하다 
- 독립운동과 병행한 어린이 운동 
- 천대받던 아이들에게 ‘어린이’를 선물하다  
-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선포 
- 어린이를 위한 최초의 잡지 [어린이]  
-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나침반 36.5도] '인문 다이제스트'에 실린 콘텐츠 이미지    
▲[나침반 36.5도] '인문 다이제스트'에 실린 콘텐츠 이미지    

“나라의 미래는 어린이에게 있다” 
올해 5월 5일은 99번째 어린이날이었다. 오직 어린이들만을 위한 날로 누구나 한 번쯤 손꼽아 기대했던 날이다. 어린이날은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하게 여기고 어린이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    

어린이를 위한 날이 이토록 국가의 큰 기념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소파 방정환’ 덕분이다. 고국의 식민지배라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도 불구하고 아동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쳐 온 그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읽어보자.     

가난했던 어린 시절, 좌절하지 않고 공부하다 
방정환은 일제강점기 때의 사회운동가이자 아동문학가, 독립운동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음 세대를 잘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평생 동안 어린이를 가르치고 어린이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힘썼다.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지금의 서울 종로 당주동인 서울 야주개의 한 가정집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큰고모, 작은고모, 삼촌 등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고, 그가 아주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가 야주개 시장거리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해 가정형편이 넉넉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집안은 아버지의 계속된 사업 실패로 기울기 시작했다. 방정환은 배고픔과 싸우며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럼에도 방정환은 좌절하지 않고 밝은 모습으로 자라났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다 7살인 1905년, 머리를 짧게 깎고 보성소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다. 그는 남들 앞에서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말재주를 타고나 마을 사람들 앞에서 변사 흉내를 내며 놀곤 했다.   

그리고 불과 10세가 되던 해에는 소년들로 구성된 ‘소년입지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을 하는 비범함을 보였다.   

독립운동과 병행한 어린이 운동 
그는 독실한 천도교 신자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인내천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1918년 방정환은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딸과 결혼했으며, 그해 청년문학 단체 ‘청년구락부’를 조직해 5년 간 활동하며 어린이 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1919년에는 손병희를 도와 3·1운동에 참가했는데 이 과정에서 독립신문을 인쇄하는 활동을 하다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받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일본으로부터 위험인물로 분류돼 일제 형사들에게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다. 

1920~1923년에는 일본 도쿄 도요대학에서 아동문학, 아동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레 어린이를 위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의 호 소파(小波)는 “잔잔한 물결처럼 천천히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바꾸겠다”라는 의미라고 밝히기도 했다. 

인내천(人乃天) |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기본 사상.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애들! 애놈이 아닙니다. 늙은이, 젊은이 하듯이 어린이라 불러야 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내 아들놈, 내 딸년, 하고 자기 물건처럼 대하지 말고

어린이를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천대받던 아이들에게 ‘어린이’를 선물하다  

방정환은 ‘애기’, ‘애새끼’ ‘애놈’이라고 불리던 아이들에게 최초로 ‘어린이’라는 호칭을 만들어 준 인물이다. 그는 이미 동경 유학을 가기에 앞서 1920년 천도교 월간지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 불 켜는 이>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당시에는 어른 중심의 유교와 봉건주의 문화가 남아 있어서 아이들이 어른과 같은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했다. 게다가 의무교육은 고사하고 농사일에 동원되거나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많은 어린이들이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고, 천대받고 학대받으면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런 아이들에게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한 호칭을 선물한 것이다.   

사람들이 어린이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방정환의 의견에 동의했고 어린이라는 말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선포 
그는 1923년 3월 아동문학 연구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그해 5월 1일 한국 최초의 ‘어린이날’을 만들어 널리 알렸다. 색동회라는 이름은 어린이들의 색동 저고리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UN이 ‘세계 어린이의 날’을 제정한 해가 1954년이고 ‘아동권리협약’을 채택한 것이 1989년이다. 그러나 방정환은 국제사회가 어린이의 존엄성을 인식하기 훨씬 이전부터 어린이들이 존중받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나간 누구보다 깨어있는 인물이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1923년 제1회 어린이날에 발표한 ‘어린이 선언문’만 읽어봐도 마음 깊이 전해져 온다. 한편, 어린이날이 5월 5일이 된 건 광복 이후 1946년이며 이때부터 법정 공휴일로 지정됐다.    

제1회 어린이날 ‘어린이 선언문’
어른들에게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보아 주시오. 
어린이를 가까이 하시어 자주 이야기하여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산보와 원족 같은 것을 가끔가끔 시켜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하게 타일러 주시오.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만한 놀이터와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해 주시오.  

어린 동무들에게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어른들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뒷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그리지 말기로 합시다. 
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들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입은 꼭 다물고 몸을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어린이를 위한 최초의 잡지 [어린이]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만든지 1년 뒤인 1923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글쓰기 실력과 말재주가 좋아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이 재주를 활용해 필명을 바꿔가며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유머, 탐정소설, 시, 자신이 번역한 동화 등을 잡지에 실었다.  

일본 유학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영향으로 사회·문화적으로 근대화가 추진돼 어린이를 위한 문학이 발전하고 서점에 어린이용 책이 즐비했지만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방정환은 ‘산드룡의 유리구두(신데렐라)’, ‘왕자와 제비(행복한 왕자)’, ‘잠자는 왕녀(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전 세계 유명 동화 10편을 우리말로 번역한 단행본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기도 했다.  

난생 처음 읽어보는 흥미진진한 볼거리에 어린이들은 ‘어린이’에 푹 빠졌다. ‘어린이’에서는 매달 상품을 주는 퀴즈를 출제하기도 하고, 조선 8도 윷놀이 판, 금강산 게임 말판, 세계일주 말판놀이 등 지금 해도 재미있어 보이는 다양한 부록을 함께 증정해 어린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깔깔박사, 소파, 북극성, 몽중인, 길동무, 삼산인, 성서인, ㅅㅎ생(오타가 아니라 실제 필명이다), SP생, ㅈㅎ생, SS생, 은파리, 목성 등 최소 30개가 넘는 필명을 사용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해 글을 썼다.   

신문이나 잡지에 글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아 같은 이름으로 계속 글을 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일제의 검열과 탄압을 피하기 위한 작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매월 1일 발행이었던 어린이 잡지는 검열 때문에 발행 일자를 지키지 못하기 일쑤였으며, 원고 통삭제, 게재 중지, 압수 등의 수모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정환의 수없는 노력 덕에 읽을거리 볼거리가 모두 풍성해진 ‘어린이’는 어린이들의 폭발적인 성원을 얻는다. 1925년 당시 서울의 인구는 30만 정도였는데 그해 판매된 ‘어린이’ 잡지 부수가 약 10만 부에 다다를 정도였다니, 먹고 살기 바빴던 그 시절의 잡지 인기가 실감되지 않는가.   

한편, 방정환은 잡지를 편집하지 않는 날에는 밖으로 나가 정기적으로 동화회를 열었다. 동화회가 열릴 때마다 동화 내용을 생동감 넘치게 구연하는 그를 보기 위해 천 명 이상의 청중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평생 어린이의 행복을 위해 살았던 방정환은 1931년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쓰러져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는 유언으로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말을 남기면서 마지막까지 어린이를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매년 동심으로 돌아가 왠지 모르게 들뜨는 즐거운 어린이날. 방정환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모든 어린이들을 보듬었듯이, 우리도 그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는 것이 좋겠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 방정환(1899~1931) -   

생각 플러스+ 
‘어린이’ 단어에는 ‘존중’이 들어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어린이’는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로 정의된다.   

그런데 최근들어 ‘초보’ 또는 ‘어떤 일을 완벽히 잘 해내지 못한다’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요리, 헬스, 주식 등 각종 분야에 어린이의 ‘-린이’를 따서 붙인 신조어들이 자주 눈에 띈다.   

국제아동인권센터는 이같은 말을 두고 “‘어린이는 미숙하다’, ‘어린이는 불완전한 존재다’라는 생각이 반영돼 있을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은연중에 어른들은 어린이를 ‘미숙하고 부족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어 그 자체로 아이를 존중하는 단어 ‘어린이.’ 앞으로 어린이의 사전적 의미를 되새기며 ‘-린이’ 대신 ‘-초보’ 혹은 ‘-입문자’ 등으로 바꿔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 

*에듀진 기사 URL: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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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나침반 36.5도' [인문 다이제스트]에 실린 내용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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