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 대한 중국역사 부속 시도 멈춰야

그들의 논리는 해괴하다

2003년 초 중국에서는 <중국고구려사>란 제목의 책이 출판됐다. ‘중국+고구려’ 논리를 노골화한 셈이다. 저자는 통화사범대학 고구려연구소 경철화 교수이다. 고구려를 중국으로 간주한 이 책은 나아가 ‘중국 역사에 따라 고구려의 시대를 구분하는’ 해괴한 논리까지 폈다.

(1) 양한(兩漢·전한과 후한) 시기: 추모왕(주몽왕)~산상왕 BC37~AD227년
(2) 위진(魏晋) 시기: 동천왕~호태왕(광개토대왕) AD227~412년
(3) 남북조 시기: 장수왕~평원왕 AD413~590년
(4) 수당(隋唐) 시기: 영양왕~보장왕 AD590~668년

이에 대해 고구려연구회 서길수 대표는 “한 나라의 시대를 구분하면서 다른 나라의 왕조에 따라 시대 구분을 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논리”라고 비판한다. 나아가 고구려가 적어도 705년을 존속하는 동안 중국과 몽골에선 모두 35개의 나라가 생겼다가 사라졌다고 분석하면서 “도대체 705년 동안 꿋꿋이 이어온 고구려가 수없이 흥망을 반복해온 중국의 어떤 나라에 속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서 교수에 따르면 고구려가 존속하는 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진 35개 왕조 가운데 70%에 가까운 24개 국가가 50년도 못 가서 망했다. 100년이 안 돼서 망한 국가는 30개로 늘어나 전체의 86%를 넘는다. 200년 이상 간 나라는 한나라(221년)와 당나라(290년), 단 두 나라뿐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35개 나라 가운데 절반 정도는 중국의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이 지배한 나라이다. 이 35개 나라는 모두 중국이 자기 나라의 역사로 간주하는 것들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경철화 같은 학자는 고구려사를 한족 위주의 4단계로 나누고 있다.

   
▲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안에 전시된 광개토대왕의 전투도. 그는 동서남북 모든 방면을 향해 정복전을 벌였다. <사진=한겨레21>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고구려는 서기 668년에 멸망했다. 그 250년 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정신을 국호에서부터 반영한 채 새 왕조를 열었다.

과연 고려인들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얼마나 강했던 것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역사의 한 장면은 고려의 서희와 거란침입군 장군 소손녕 사이에 벌어진 역사 논쟁이랄까 외교 논쟁이랄 수 있다.
 

   
▲ 역사논쟁 끝에 거란 장군 소손녕을 물리친 고려의 서희 <사진=한겨레21>

고려 성종 12년(993년) 거란의 요나라가 80만 병력을 동원해 침입해오자 고려 조정은 들끓었다.

“거란의 군세를 당할 수 없으니 항복을 하자”는 ‘항복론’과,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베어주고 강화를 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조정의 대세를 이루고 있을 때 서희는 홀로 담판에 나선다.

소손녕은 이렇게 주장한다. “그대의 나라 고려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나라 소속인데 당신들이 이 땅을 침식하고 들어왔다. 나아가 우리와 땅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와 관계를 맺으므로 오늘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제 땅을 베어 바치고 조공을 하면 무사할 것이다.”

이에 대해 서희는 이렇게 반박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따라서 국호를 고려라 하고 수도도 평양으로 정한 것이다. 만약에 경계를 가지고 말한다면 귀국의 동경(요양)도 우리 국토 안에 들어와야 한다. 당신이 어떻게 우리가 침범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만일 여진을 구축하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어 거기에 성과 보루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를 맺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약 나의 의견을 귀국의 임금에게 전달한다면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결국 서희의 이 논거가 받아들여져 요나라 군사는 철수하게 된다. 이 담판과 관련해 한편에서는 요나라로서는 고려가 송나라와 국교를 끊고 자신들과 국교를 맺도록 하는 것을 받아들였기에 철수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담판은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국제적으로 선언하고 불완전하나마 관철시킨 한 장면으로 평가받는다.

한편 <고려세계>에서는 왕건의 조부 작제건을 ‘고(구)려인’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왕건 스스로도 “발해는 본래 나의 인척의 나라”라고 발언하는 등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하게 나타난다. 나아가 송나라 때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서도 “고려 왕씨의 선조는 고(구)려의 대족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중국 역사지도 속의 고구려

중국의 역사지도에선 고구려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특히 고구려의 귀속 문제로 논쟁이 가열되는 지금 이 문제는 그 의미가 매우 깊다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에서 제시하는 역사지도가 본격적으로 출판되고 있지는 않다.

다만 1982년 처음 출판돼 지난 1996년 6월 2차 인쇄를 한 중국지도출판사 발행 <중국역사지도집> 전 8권이 나름대로 최고의 권위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지도집은 중국사회과학원이 주판공청이며, 담기양 교수가 편집 총책임을 맡았다.

고구려와 관련된 지도 부분은 동북공정의 방향성과 달리 이전까지의 중국쪽 역사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지도1: 전한시대=고구려는 일단 현토군 안에 들어가 있다(초록색의 한나라 영역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를 큰 글씨로 표시해 주변의 한나라 영역 밖에 있는 부여·숙신·옥저 등과 동격으로 표시하고 있다. 반면에 도시로서의 고구려(高句驪)는 한자 표기를 다르게, 아주 작게 표시해놓고 있다.

   
▲ <사진=한겨레21>

지도2: 후한시대=고구려는 완전히 중국 군현에서 벗어나 있다. 노란색으로 선명하게 분리돼 있고, 한군현이 대거 후퇴돼 있다. 한반도 남부는 아직 삼한으로 표시돼 있다.

지도3: 5호16국시대=고구려가 중국에서 분리된 별도의 영역으로 표시돼 있다. 중국쪽의 보라색 제나라와는 거란에 의해 확실하게 분리돼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는 하나의 같은 영역으로 된 채 나라별로 구별돼 있지 않다.

지도4: 수나라시대=고구려는 수나라와는 요하를 경계로 갈라져 있다. 그런데 인쇄의 잘못인지 정권부족계(Boundary of a regime or a tribe)의 색깔선은 명확하게 돼 있으나 파란 점선은 돼 있지 않다.

고구려·백제·신라는 역시 하나의 영역 속에 들어 있고 별도로 구별돼 있지 않다. 이 지도에 따르면 고구려의 경계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장춘 훨씬 북쪽의 헤이룽장성 북단 송화강 유역, 동으로는 두만강 하류의 훈춘 지역, 남쪽으로는 한강유역 정도까지 돼 있다.

만주 동부쪽에서는 말갈의 영향권이 많이 파고들어온 형상으로 돼 있는데, 이는 고구려와 말갈의 실질적인 종속 관계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 <사진=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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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생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김용만/창해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이라고?> 월간중앙 역사탐험팀/중앙일보시사미디어
-<한국의 인간상1> 신구문화사
-<인물로 보는 한국고대사> 천관우/정음문화사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최광식/살림

▶▶ 대학생 이상
-<고구려연구 1~17집> 고구려연구회/학연문화사(02-865-5072)
-<고구려연구회 학술총서 2집-서희과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 고구려연구회/학연문화사
-<고구려연구회 학술총서 3집-광개토대왕과 고구려 남진정책> 고구려연구회/학연문화사
 

<고구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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