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이덕일 역사TV
*사진 출처=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이덕일 역사TV)

한국인은 일본에 의해 짓밟힌 35년간을 치욕으로 생각한다. 한국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치욕의 역사다. 그런데 여기에 고대의 한사군은 더욱 큰 좌절을 느끼게 한다. 근세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고조선시대에도 중국에게 속국을 했었단 말야"라고 생각하고 고대사를 쳐다보기 싫게 만든다. 그리고 잊는 것이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외면하게 된다.  

만약 이런 고대사부분이 일제가 만들어 낸 조선을 식민지화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왜곡을 한 것이라고 알게 되면 우리 고대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대학의 강단을 꽉 차지한 일본 식민사관을 따르는 대학교수들이라면 우리는 그들 대학교수들을 강단에서 퇴출시켜야 한다. 한국인의 탈을 쓰고 일본의 말을 따르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으며, 때로는 일본의 돈을 받아 연구하는 명목으로 돈을 버는 그런 사람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일제의 식민지사관에 대응해 역사학자인 독립운동가들의 역사학을 계승하고 연구하는 단체가 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의 이덕일 소장이다. 이외에도 역사적 사료와 고고학적 유물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기상을 바로 세우는 학자들이 있다. 여기는 이들이 연구한 성과를 기반으로 작성된 이덕일의 역사TV에서 발표한 자료를 글로 옮긴 것이다. 당분간은 교과서의 역사와 실제 역사를 분리해서 배워야 한다.  

일제는 철저히 한국사를 왜곡시키고 한국인의 조상을 한반도 내에 가두기 위해 온갖 사실을 왜곡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어져 오게 만든 역사학자들이 대학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존재하는 한 쉽지 않은 싸움이지만 적어도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정신적 식민시대를 종식시킬 수 있다.

고대사의 사료 자체는 엄청나게 많지는 않지만 그대로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약간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보강되어야 하는 것은 고고학 자료들이다.

고조선의 강역도 상당히 오랜 논쟁거리 중에 하나이다. 고조선의 강역이 어디까지였는가는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일본인들과 조선조 유학자들도 일부 그렇다고 볼 수 있는데 반도사관에 따라서 고조선의 강역이 지금의 평양의 대동강을 중심으로 평안남도에 있던 작은 소국이었다는 설이다.

그리고 이것을 따라 해방 이후 국사학계의 태두라고 하는 이병도 박사가 강단사학에서 고조선은 평안남도에 있던 작은 소국이라는 주장을 펼쳐왔다.

다른 하나는 과거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를 공부했던 독립운동 출신의 역사학자들은 작은 소국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이 있는 하북성 일대까지 뻗쳐있던 그런 강력한 제국이었다는 주장을 해왔다.

논쟁을 좁혀보면,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 독립운동가이면서 역사학을 공부한 두 부분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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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경우이건 역사는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 고조선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이기 때문에 고조선 강역이 넓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민족감정에는 맞을지 모르지만 역사학은 과거에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밝히고 그 밝힌 것을 해석하는 학문이다. 자칫 후대의 바람을 가지고 과거에 붙여서 사료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고조선의 표지 유물들이 나오면 그것은 곧바로 고조선 강역이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의 표지 유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비파형동검이다. 비파같은 악기처럼 생긴 동검인데,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지역들, 그 가운데 다수 출토되는 지역들은 다 고조선 강역이라고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도 고조선의 강역이 평양 중심이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이 많았다. 역사학을 크게 둘로 나누면 문헌과 사료를 가지고 해석하는 문헌사학과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해석하는 고고학자로 나눌 수가 있다. 문헌을 가지고 공부한 학자들은 모두가 "고조선은 고대 요동이라고 불렀던 지역, 지금의 하북성 일대까지 펼쳐져 있던 강역을 가지고 있던 제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중국 고대 사료에 "고조선은 고대 요동에 있었다"라고 나오기 때문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지금의 요동은 요녕성 동쪽을 말하지만 지금의 천진 북쪽 개연이란 곳과 옥전이라는 곳이 있는 그 지역이 고대의 요동이다. 물론 그 자료는 중국 사료들이 나오기 때문에 고조선이 무너진 자리에 세운 낙랑군은 옛 고조선이라는 것이 된다.(한사군에서 나오는 낙랑군과 고조선의 제후국인 낙랑국은 다른 이름이다)

한사군의 위치는 한사군이 실제 있었을 때 쓰인 역사서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한사군 중 핵심인 낙랑군의 위치를 알면 나머지 삼군의 위치를 유추할 수 있다. <사기><조선열전> 주석에서 2세기 때의 학자인 응소는 <지리지>에 따르면 요동군 험독현이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라고 말했다.

험독현이 ‘요동군’소속이라는 사실 자체가 낙랑군은 평양에 있을 수 없음을 말해준다. 이외에도 <한서><지리지>에도 낙랑군 25개 현주에 열구현이 나오는데 <후한서><군국지>에는 열은 강의 이름이고 열수는 요동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남한 강단사학은 열수를 아무런 사료적 근거도 없이 대동강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문헌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자들은 문헌에 나와 있는 대로 고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그 반대로 고조선이 평양 대동강 유역이었다는 주장하고 있었다.

일제 조선총독부 시절 나중에 가짜였다는 것이 판명되기는 하였지만 평양에서 출토했다는 낙랑군의 고고학 유물이 나왔기 때문에 당시에 고고학자들이 이 주장을 펼치는 것 역시 당연했다.

그래서 이 두 이론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북한 내에서 고조선의 강역을 분명하게 하자는 의지가 있어 고고학자들과 문헌학자들하고 논쟁을 하다가 리지린이라는 역사학자를 북경 대학원에 유학을 보내게 된다.

https://www.365com.co.kr/goods/view?no=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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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북경대에 고힐강이라는 아주 유명한 역사학자가 있었는데 의고사변 학파의 대표격인 인물이다. 이 고힐강을 지도교수 삼아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게 된다. 이렇게 1961년에 북한의 리지린이 고조선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는데 이것이 남북한 최초의 한국학 박사학위이다.

중국의 수많은 원전을 인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읽기가 상당히 어려웠는데 2018년 번역해 출간했다. 1961년도에 나온 박사학위 논문인데 그 주요 핵심 내용들이 고조선이 평안남도에 걸쳐 있던 작은 소국이 아니라 대륙까지 걸쳐있던 광대한 제국이다.

구체적으로 BC 5세기에서 4세기 때까지 고조선이 서쪽 광역이 지금의 하북성 난하까지였고 그 다음에 연나라 장수 진기에게 강역을 조금 뺏기고 난 다음, 서기 3세기~2세기 무렵 이후에는 요녕성 대릉하까지가 고조선의 강역이었다라고 하는 (사진 첨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본 식민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학설 중에 하나였지만 북한학계는 1961년에 고조선은 대륙 고조선이고 낙랑군은 현재의 요동반도에 있었다라고 하는 학설인 요동설로 정리를 했다.

이런 연구가 있음에도 강단사학자들만 해방이후에도 자신들의 식민사관 주창자들인 그들의 스승들이 말하고 가르쳐준 그대로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라고 줄기차게 아직도, 여전히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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