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5년 #독일 #백내장 바흐와 헨델의 평행이론? 
-‘바로크 시대’ 이끈 두 명의 음악가 
-음악 명문가 출신, 평생 고달프게 살다 
-교회 음악을 아름다운 예술로! 
-화려한 궁정 음악가, 음악으로 부를 누리다 
-반복되는 ‘다 카포’ 금방 기억되는 멜로디! 

▲[톡톡 매거진] '똑똑 라이브러리'에 실린 콘텐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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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아버지’ 바흐, ‘음악의 어머니’ 헨델. 바흐와 헨델이 음악의 부모로 불리는 이유는 두 사람이 그만큼 서양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바로크 시대를 이끈 두 음악가, 바흐와 헨델의 이야기를 읽어봅시다.  

#1685년 #독일 #백내장 바흐와 헨델의 평행이론? 
바흐와 헨델은 살면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지만 마치 평행이론처럼 특별한 공통점이 있었어요. 그들은 같은 나라 독일에서 같은 해인 1685년에 태어났습니다.  

또한 말년에 둘 모두 시력을 잃었어요. 그것도 같은 돌팔이 의사에게 엉터리 치료를 받다가 말이에요. 모든 생을 음악과 함께 했던 바흐와 헨델은 각각 1750년, 1759년에 백내장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런 삶 말고도 그들은 ‘바로크 음악’이라는 근대 서양 음악 발전에 가장 앞선 사람들이었어요. 이후에 등장할 ‘고전주의 음악’의 밑거름이 된 바로크 시대를 완성한 인물이 바로 이들이었죠.  

‘바로크 시대’ 이끈 두 명의 음악가 
바로크는 16세기부터 약 17세기 반에 걸쳐 유행한 예술의 방향을 말합니다. 바로크는 ‘일그러진 진주’라는 의미를 가진 포르투갈 ‘바로코(baroco)’에서 유래했는데요. 바로 전 시대에 유럽을 휩쓸었던 르네상스 열풍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한 새로운 경향이죠.  

바로크 예술, 바로크 음악은 ‘웅장하고 거대한 것’을 떠올리게 해요. 하늘 높이 솟아오른 교회 지붕이나 엄숙하고 장중한 오르간 소리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 이유는 바로크가 바로 ‘탐험의 시대’에 태어난 예술이기 때문인데요.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더 넓은 세계를 향해 탐험을 시작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고 크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웅장하고 장엄한 예술 풍조가 유행하게 된 거예요.  

바흐와 헨델은 바로 이런 시대를 이끌었던 음악가들이었어요. 그러나 이들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커다란 차이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작용 | 어떤 움직임에 대해 그것을 거스르는 반대의 움직임이 생겨남. 또는 그 움직임  

바로크 시대의 명화와 건축  

▲바티칸에 있는 ‘산 피에트로 바실리카’ 대성당 
▲바티칸에 있는 ‘산 피에트로 바실리카’ 대성당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음악 명문가 출신, 평생 고달프게 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는 250여 년 동안 무려 50여 명의 음악가를 배출한 뼈대 있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당숙의 오르간 연주를 들으며 자랐죠.  

하지만 음악 명문가에서 태어난 바흐의 인생은 겨우 아홉 살 무렵,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고아가 된 바흐는 가난에 시달리며 큰형 요한의 집에서 자라게 됐는데요. 큰형도 바흐를 먹여 살릴 만큼 형편이 좋지 않아 바흐는 겨우 14살이 되던 해에 형의 집을 나와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흐는 먼저 스스로 먹고 살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 북부 뤼네부르크에 있던 교회 합창단원이 됐어요. 합창단원이 되면 학비를 내지 않아도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니까요. 무사히 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연주자로 활동하며 교회에 취직해 바이올린과 오르간을 연주하는 일을 했습니다.  

교회 음악을 아름다운 예술로!  
바흐는 살면서 수많은 곡을 작곡했으며, 그 중 대부분이 교회 음악이었어요.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던 바흐는 이전까지 형식에 충실해 있던 교회 음악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왠지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경건한 마음이 들고, 차분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 아닐까요?  

바흐는 이전까지는 오르간을 연주할 때 엄지손가락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바흐는 엄지손가락까지 써서 더 아름답고 예술적인 음악을 만드는 데 몰두했어요. 또 여러 가락이 동시에 엮여 나가는 다성 음악 가운데 ‘푸가(fuga)’를 통해 모방 형식을 완성했어요.  

한편, 어려운 형편 속 생계를 유지하면서 그가 작곡한 곡들은 그가 죽은 이후 이리저리 팔려나가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러나 100년 후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활동하던 멘델스존(1809~1847)이 바흐의 음악에 감탄하며 사라진 악보들을 찾아내 세상에 널리 알렸습니다. 따라서 역사 속에 잊혀 가던 위대한 음악가가 다시 음악사에 빛을 발할 수 있었습니다.  

당숙 | 아버지의 사촌 형제  
승화 | 어떤 현상이 더 높은 상태로발전하는 일  


화려한 궁정 음악가, 음악으로 부를 누리다 
그렇다면 헨델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은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헨델의 아버지는 귀족의 이발사이자 외과 의사였어요. 당시에는 이발사가 외과 의사의 역할도 겸했거든요.  

헨델의 아버지는 헨델이 법관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음악을 공부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죠. 아버지는 헨델에게 ‘음악이란 굶어 죽기 딱 좋은 짓’이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러나 어린 헨델은 포기하지 않고 한밤중에 다락방에 올라가 달빛 아래서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법을 익히는 등 음악 공부에 열을 올렸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음악 공부를 허락해 헨델은 아홉 살부터 오르간 연주와 작곡을 배우게 됐습니다. 아버지의 우려와 달리 헨델은 음악을 사업과 연결시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어요. 그것은 바로 대규모 연주회를 여는 것이었죠.  

당시에는 왕궁이나 귀족들만 모여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탈리아에서 음악 공부를 하며 ‘오페라’까지 섭렵한 헨델은 여러 가지 사업을 통해 대중들에게 음악을 알리며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반복되는 ‘다 카포’ 금방 기억되는 멜로디!  
자유롭고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헨델은 바흐와 달리 결혼도 하지 않고 영국으로 건너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외롭지만은 않았어요. 왕과 왕비의 후원을 받아 온갖 기교를 살린 화려한 오페라 음악을 만들며 먹고 살았거든요.  

특히 그는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연주하는 ‘다 카포(da capo)’ 형식의 음악을 많이 만들었어요. 마치 우리가 즐겨 부르는 가요에서 비슷한 멜로디가 반복해 나오는 것처럼 말이에요. 덕분에 청중 들은 좋은 멜로디를 거듭 들으면서 곡을 익힐 수 있었죠.  

헨델은 평생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영국인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영예를 안 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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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진 기사 URL: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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