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가능은 없다" 
- 나폴레옹의 등장 
- "알프스따위는 없다" 
- 트라팔가르 해전 
- 최후의 전투 '워털루' 

▲[톡톡 매거진] '똑똑 라이브러리'에 실린 콘텐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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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인물이 있습니다. 가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올라 유럽의 절반을 정복한 불굴의 지도자 ‘나폴레옹’인데요. 정복자로, 정치인으로, 군인으로, 황제로 다양한 업적을 남긴 ‘나폴레옹 시대’의 이야기 속으로 함께 떠나봅니다. 

"불가능은 없다" 
1802년 프랑스 혁명이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한 명의 영웅이 탄생했어요. 키가 150센티미터밖에 안 되었던 스무 살의 젊은 군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그 주인공입니다.

당시 프랑스 주변 국가들은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번질 것이 두려워 프랑스와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가장 먼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정복했습니다. 한동안 유럽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전진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레옹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에게, 또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풍운아로 이름을 날리던 나폴레옹은 결국 세인트헬레나 섬에 갇힌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등장 

* 황제 시절의 나폴레옹 
* 황제 시절의 나폴레옹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인 1795년 국민 공회는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총재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다섯 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 인회가 입법권을 갖는 체제였지요.

총재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왕당파들이 일으킨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어요. 총재 정부는 한 젊은 군인에게 폭도를 진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젊은 군인은 궁전으로 나 있는 모든 길에 대포를 설치했습니다.

그러자 아무도 감히 그 앞에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이 젊은 군인의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일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나폴레옹은 지중해에 있는 코르시카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 사람이었습니다. 시기를 잘 타고난 덕이었습니다. 원래 코르시카는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으나 그가 태어나기 불과 몇 주 전에 프랑스 땅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프랑스에 있는 육군사관 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닌 프랑스 친구들이 그를 무시했지만, 나폴레옹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학을 매우 잘했으며 어려운 문제를 좋아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푸느라고 3일 밤낮을 방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을 종결시킴으로써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에 드디어 장군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유럽 국가에 왕이 있었습니다. 미국 독립 혁명의 열기에 사로잡힌 프랑스만이 왕을 몰아낸 상태였습니다.

프랑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의 왕들은 혁명의 열기가 자기네 나라에까지 미치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왕을 몰아낸 프랑스와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알프스따위는 없다" 

*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로 가기 위해서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했습니다.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이 넘었던 바로 그 산맥이에요. 한니발은 최소한 대포를 짊어지고 산맥을 넘진 않았습니다.

대포를 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런 일을 잘해 낼 법한 기술자들에게 그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기술자들은 하나같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불가능은 바보들의 사전에나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소리쳤습니다. 
“알프스 따위는 없다.” 

그는 꿋꿋이 진격해 알프스를 넘고 이탈리아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은 프랑스로 돌아오는 나폴레옹을 정복 영웅이라고 부르며 기쁘게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를 다스리던 총재 정부는 나폴레옹을 두려워했습니다.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그가 행여 왕이 되려고 하지나 않을까 겁이 났던 거예요. 마침내 나폴레옹은 1799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민심을 잃은 총재 정부를 전복시키고 통령 정부를 수립해 제1통령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트라팔가르 해전 

* 트라팔가르 해전 
* 트라팔가르 해전 

나폴레옹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집트를 정복하기로 마음먹은 거예요.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항로를 끊어 놓으려고 했던 거죠. 인도는 영국이 제임스 1세 때 식민지로 만든 새로운 땅이었습니다. 이미 독립 전쟁으로 미국을 잃은 영국으로부터 인도마저 빼앗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프랑스의 총재 정부는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비운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하며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군의 사령관이 되어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처럼 아주 빠른 속도로 이집트를 정복했습니다. 물론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존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던 동안, 나일 강 어귀에서 나폴레옹을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함대에 포위되어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영국 함대를 이끈 장군은 넬슨 제독이었습니다. 

함대가 격파당하는 바람에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갈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이집트에 남아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선박을 구해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어요. 

마침 프랑스는 정부 내부의 분열로 정국이 어지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틈을 노려 나폴레옹은 프랑스 최고 통치자 세 명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제1집정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두 명도 집정이기는 했으나 사실상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드는 신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종신 집정의 자리에 오르고, 또 오래지 않아서 프랑스 제국과 이탈리아 국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러자 유럽의 모든 국가가 나폴레옹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럽 전체를 정복해 프랑스의 땅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유럽은 나폴레옹에 대항해 하나로 뭉쳤습니다. 나폴레옹은 가장 먼저 영국을 정복하기로 계획하고, 함대를 정비해 영국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스페인의 트라팔가르에서 영국 함대에 또다시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이집트에서 프랑스 함대를 전멸시켰던 넬슨 제독의 함대였습니다.

이 해전이 있기 전에 넬슨 제독은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군들은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라.” 넬슨 제독의 말대로 영국 병사들은 자기 임무를 다했습니다. 영국 함대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를 완전히 격파시켰습니다. 그러나 넬슨 제독은 이 전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영국을 정복하려던 꿈을 접고, 완전히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스페인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이미 정복한 뒤였습니다.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프랑스의 것이 되거나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최후의 전투 '워털루' 

* 워털루 전투 
* 워털루 전투 

이제 나폴레옹의 목표는 러시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시키는 대륙 봉쇄령을 내렸는데, 영국과의 무역에 의존하던 러시아가 대륙 봉쇄령을 어겼거든요. 그러나 러시아를 목표로 삼은 것은 커다란 실수였습니다.

러시아는 지리적으로도 너무 먼 곳에 있거니와 지독히 추운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가까스로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모스크바에 화재를 내서 먹을 것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는 바람에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게다가 끔찍한 추위와 폭설까지 더해져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은 병사의 수가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군대는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러시아에서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각자 원하는 곳으로 돌려보내고 파리로 직행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행운의 여신은 이미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난 뒤였습니다.

유럽 전체가 폭군의 압제에 종지부를 찍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럽 동맹군에 포위당하고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프랑스를 떠나겠다는 협정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탈리아 해안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고향인 코르시카 섬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 유배되어서도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며 프랑스로 돌아가 다시 권력을 잡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프랑스 해안에 상륙해 프랑스와 유럽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오래도록 나폴레옹과 함께 전쟁을 치렀던 병사들로 군대를 조직한 다음, 나폴레옹을 잡아 와 파리의 철창에 가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폴레옹을 만난 병사들은 오랜 시간 함께 전쟁을 치렀던 나폴레옹의 편에 섰습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그들을 이끌고 파리로 입성했습니다. 

이에 프랑스 북부에서는 영국군과 독일군이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빠르게 군대를 조직해 영국군과 독일군이 있는 북부로 진군했습니다. 워털루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프랑스와 연합군의 전투는 나폴레옹 최후의 전투로 기록됩니다.

나폴레옹은 웰링턴 공이 이끄는 영국군에 완전히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1815년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로 ‘워털루전투’는 참혹한 패배를 상징하는 말로 아직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난 뒤, 영국은 그를 바다 한가운데에 홀로 떠 있는 조그만 섬에 가둬 버렸습니다. 다시는 탈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외롭게 떠있는 그 섬의 이름은 세인트헬레나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이름을 딴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지 6년 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였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수십만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점에서 역사상 가장 악랄한 사람 중 하나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전쟁에서 휩쓸고 간 자리는 모조리 폐허가 되었고, 그 피해가 유럽 전역에 달했습니다. 

* 나폴레옹의 죽음
* 나폴레옹의 죽음

1799년 ▶ 나폴레옹이 단독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 정부를 전복시키고 실질적인 입법권을 가진 통령 정부를 수립해 제1통령이 되다. 
1804년 ▶ 나폴레옹이 국민 투표에 의해 나폴레옹 1세로 즉위해 초대 황제가 되다. 근대 시민법의 기본 원리로서 모든 민법전의 모범이 된 『나폴레옹법전』이 제정되다. 
1806년 ▶ 나폴레옹이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내려 유럽 대륙과 영국의 모든 교역을 금지시키다. 영국과의 무역에 의존하던 러시아가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대륙 봉쇄령을 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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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제공=리베르스쿨

*에듀진 기사 URL :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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