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를 빼앗긴 고통만큼은 견딜 수 없다” 
- 일제에 맞선 항일 독립운동 ‘3·1운동’ 
-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 “한민족 사상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국내 항일운동 한계 절감, 해외에서 무장 투쟁한 독립군 
- 세계사를 뒤흔든 3·1운동의 영향 

 ▲[나침반 36.5도] '3월 오늘의 역사'에 실린 콘텐츠 이미지      
 ▲[나침반 36.5도] '3월 오늘의 역사'에 실린 콘텐츠 이미지      

“나라를 빼앗긴 고통만큼은 견딜 수 없다”  
조선은 19세기 후반부터 일본, 청나라,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과 수많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 이권을 빼앗기고 그들로부터 끊임없는 침탈을 겪게 된다. 결국 1910년,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강탈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절망적인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자유와 해방, 민족국가의 회복을 갈구하며 여러 분야에서 끊임없는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에 맞선 항일 독립운동 ‘3·1운동’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일제에 맞서 민족의 자주와 자결을 주장한 항일 독립운동이자 자유와 정의, 평등과 인류 평화를 지향한 인도주의 운동 ‘3·1운동’이 일어났다. 3월 1일 서울, 평양, 의주, 원산 등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 갔다. 

식민지 생활로 고통 받던 시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때마침 고종의 인산일(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도 시위에 합류했다. 농촌 시위의 경우 장날을 이용해서 주동자가 연설하거나 격문을 읽고 나면 곧바로 태극기를 흔들면서 목청 높여 행진했다.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던 글 기미독립선언문 [출처=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던 글 기미독립선언문 [출처=대한민국역사박물관]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온 나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함성으로 뒤덮이자 당황한 일제는 경찰, 군대, 소방대, 재향 군인회 등을 동원해 총칼로 시위 참여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리고 전례 없는 우리 민족의 거센 저항에 일제는 통치 방식을 바꾸기로 한다.   

그들은 이전처럼 헌병 경찰을 내세워 폭력으로 억압하는 ‘무단 통치’에서 해방시켜주는 듯했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조선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해주는 척했지만, 뒤에선 조선인들을 더욱 교묘하게 감시하고 탄압하는 ‘민족분열통치’였다.  

“한민족 사상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국사편찬위원회가 지난 2019년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공개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당시 시위 참가 인원은 최소 80만~최다 103만명이며, 사망자도 최소 725~최다 934명에 이르렀다.   

또 1919년 3~4월 전국에서 일어난 시위와 파업, 휴학은 모두 2,464건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시위만 1,692건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2,0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걸 감안하면 한민족 사상 최대 항일 민중운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3·1운동 이후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에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1919년 4월 11일). 이후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수차례 해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삼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제 정부였고, 독립운동을 총지휘하는 중추적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현대의 대한민국은 헌법 전문에 명시돼 있듯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해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해,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해 개정한다.  
-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  

국내 항일운동 한계 절감, 해외에서 무장 투쟁한 독립군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3·1운동 이후 비폭력 항일운동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자각하고, 무장독립전쟁을 벌이는 것이 독립을 달성하는 지름길이라고 인식했다.   

특히 당시 만주와 연해주는 한인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국내와 가까운 대신 일본의 통제가 직접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1920년대에는 이들 지역을 기반으로 많은 무장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됐다. 그렇게 독립군 단체들의 투쟁은 일제에 해방되는 1945년까지 계속됐다.   

세계사를 뒤흔든 3·1운동의 영향 
미국의 뉴욕타임즈, 워싱턴타임즈, AP통신, 이그재미너, 프랑스 앙탕트, 영국 모닝포스트, 상해 민국일보는 물론 러시아와 남미 등 각국의 언론은 조선의 3·1운동 소식을 앞다투어 다뤘다. 조선의 항일운동 소식이 전 세계에 전해지자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던 다른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요인(要人) |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 또는 윗자리에 있는 사람    

그날이 오면 

심 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이러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룡소슴칠 그날이 、 
이목숨이 끊지기전 (前)에 와주기만하량이면 
나는 밤한울에 날르는 까마귀와같이 
종로(鐘路)의 인경 (人磬)을 머리로 드리바더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저 산산 (散散) 조각이 나도 
깃버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한 (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길을 울며 뛰며 뒹구러도 
그래도 넘치는 깃븜에 가슴이 미여질듯하거든 
드는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 (鼓)을 만들어 들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 (行列)에 앞장을 스오리다 
우렁찬 그소리를 한번이라도 듯기만하면 
그자리에 꺽구러저도 눈을 감겠소이다 

소설가이자 민족운동가인 심훈이 1930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일을 기념해 쓴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저항시 [그날이 오면]이다. 나라 잃은 설움과 독립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비록 그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우리는 이들과 같은 수많은 선조들이 있었기에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  

103년 전 3월 1일,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 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정신을 잊지 말고 기억하길 바란다.    

*에듀진 기사 URL: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240
기사 이동 시 본 기사 URL을 반드시 기재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 기사는 진로 진학 매거진 '나침반 36.5도' [3월 오늘의 역사]에 실린 내용의 일부입니다.     
경쟁력 있는 나만의 학생부 만드는 비법이 매달 손안에 들어온다면? 학종 인재로 가는 길잡이 나침반 36.5도와 함께라면 가능합니다. 매달 선명해지는 대입로드를 직접 확인하세요!  

* 대입 합격 길 알려주는 '나침반 36.5' 매거진 정기구독 이벤트 자세히 보기 [배너 클릭]   

 

관련기사

저작권자 © 에듀진 인터넷 교육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