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판적 사고력을 동원하면 알 수 있는 방법: 한국의 완도가 아닌 이유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부의 상징 중에 한 사람은 신라 장보고 장군이다. 그가 그 땅에 살았기 때문이다. '아 그랬지'하고 넘어가면 안 된다. 왜 그런지를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장보고는 신라말기 해상을 장악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누렸던 장수로 새로운 신라왕의 옹립에도 도움을 주었던 권력자이기도 했다. 여러 사서와 현재에 발견된 장보고와 관련된 내용들을 통해 신라의 위치와 장보고의 활동위치 를 비교해보기 바란다.

우리나라 어디에도 장보고의 고향은 없다. 우리나라의 연개소문, 을지문덕, 계백장군 등 수많은 위인 중 한반도에 흔적도 없는 위인들이 많이 있다. 어디에 있을까요? 게다가 세계적 항구였을 청해진을 지금의 완도라고 하기에는 지금의 완도가 너무 작다.

첫째 완도는 현재도 항구가 아닌 작은 어촌에 불과하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일은 없다. 1000년 전에도 유명한 항구였다면 지금쯤 부산항보다 커야한다. 완도가 청해진이라는 것은 추론과 비판적 사고가 너무 부족하다. 청해진이 어디여야 가장 합리적인 추론일까?

▶ 장보고는 누구인가?
9세기 신라 말기 신라의 서쪽에는 당나라, 북쪽은 대진국(발해)이 존재했다. 삼국사기와 신당서의 기록을 보면, 중원 사람들이 신라인을 노비로 삼고 있어 장보고는 신라 흥덕왕에게 군사 진영을 설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흥덕왕은 흔쾌히 1만 명의 군사를 보냈으며 이에 보급, 식솔 인원 등을 포함하면 수만 명의 신라인이 청해진에 주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중국(중원)에서 신라인을 납치하던 해적은 어떤 국가의 사람들이였을까? 백제 유민? 대진국(발해) 사람? 신라 군대 1만 명이 주둔할 수 있는 곳, 그곳은 분명히 신라 땅이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사기는 명나라의 눈치를 보던 조선이 편집해 만들었기 때문에, 장보고의 출생지와 족보에 대해 모른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장씨의 족보 책에는 그들의 출생지가 중국 절강성 소흥(蘇興)으로 기록돼 있다.

▶ 청해진의 청해는 어디일까?
청해진의 청해는 현재 우리가 칭다오로 알고 있는 청도(靑島)이다. 청도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청주(靑州)로 불리고 있으며, 한반도의 충북 청주(淸州)와는 한자가 다른 곳으로 고려사에도 무수히 기록된 곳이다. 즉 당시 이곳은 우리 조상들의 영토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청해진이란 진영 즉 군사기지로, 역사책에 진(鎭), 영(營), 위(衛)의 한자로 쓰였다. 그곳은 정해위(靖海衛)로 고지도에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그곳에는 완도(Wando)라고 불리는 곳도 존재한다.

청도에서 가까운 곳에 장보고의 소유지였던 적산법화원이 지금도 존재한다. 적산법화원은 동아시아 불교 교류의 장이자 동아시아 불교 발전의 성지였다. 적산법화원에는 장보고 공적비, 장보고 전기관, 장보고기념탑, 법화우의보정, 적산대명신, 적산명신, 관음상, 적산풍경명승구 등 정말 장보고에 관련된 곳이 많이 있다.

또한 중국인에게는 부의 상징인 장보고의 대형 동상도 있다. 너무 넓어서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한민족의 흔적을 인정사정없이 없애고 있는 중국이 왜 이곳에 우리 신라 역사의 유적을 남겨두고 소중히 지키고 있는 것일까? 중국 입장에서 보면 신라가 중국역사여야만 하는 당위성이 존재하지 않을까?

▶ 일본의 기록과 한국의 청해진
일본의 엔닌이라는 스님의 일기장인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보면, 양자강 부근에 도착해서 중국동부를 이동하는데 무수히 많은 신라인을 만났다고 기록돼있다. 이 기록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신라방, 신라소 즉 신라인들의 마을이다.

현재도 중국 동남부에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신라마을이 10곳이 넘는다. 과연 그곳은 어느 나라의 땅이었을까? 군대를 주둔시키고, 신라인들이 가득 살던 곳 말이다.

엔닌이 일본을 떠나갈 때 한반도 전라도의 완도 청해진을 들렀다는 기록은 없다. 역사는 이렇게 상호 비교해보고 분석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현재 한국사에서 배우는 청해진은 전라남도의 갯벌터 완도이다. 과거 해상왕의 거점이 지금의 완도라면 지금쯤은 부산항보다 더 커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부산항처럼 대형항구로 발달하지 못한 완도가 당시 세계적인 항구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과거에도 엄청난 물류 요충지였고 해상왕으로 등극했던 장보고의 본진이 있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너무 떨어진다. 유럽의 역사에서 보면 과거부터 지리적 요충지는 지금도 지리적으로 요충지이다. 게다가 해상 요충지는 더더욱 그렇다.

현재 칭다오로 불리는 산둥성 청도 인구는 1천만 명으로 서울의 인구와 비슷하다. 게다가 지금도 산둥성은 동이족이 살던 곳으로 유명하다. 오히려 중국 사람들이 산둥성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는 일화는 유명하다.

여전히 우리와 같은 핏줄이 살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당시 살던 사람들이 국가 정부의 이동에 따라 모두 한반도로 넘어 온다는 것은 더 엄격해진 국가단위에서 사는 지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일제시대 일본에는 200만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거나 귀화당해 살고 있다. 조선 국적으로 살기에는 곤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과 북조선으로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 어느 나라를 선택해야 할까? 생활의 터전이 일본에 있는데 올 수 있었을까?

▶ 우리가 모르는 신라의 기록
삼국사기 등 우리나라와 중국의 여러 사서에는 고구려, 백제의 최전성기에 중국 동부를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린 통일신라의 영토는 어디여야 할까? 또한 삼국사기 일식기록 67개의 과학적 증명은 신라의 본토가 중국 동부에도 있었음을 증명한다. 다만 삼국이 자주 싸운 것으로 보아 시기적으로 영토는 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에 기록된 신라의 9개의 주변 적국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1층은 왜국(倭),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契丹), 8층은 여진(女眞), 9층은 예맥(穢貊)이다.  이 나라들은 어디에 존재했던 나라이기에 신라를 침략했을까?

신라의 입장에서 1층부터 가장 위험한 나라순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참고로 삼국시대 일식기록상 왜는 현재의 일본이 아니라, 중국동남부와 대만을 포함하는 영역으로 나타난다. 중국의 신당서에는 동이를 5개국, 즉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 일본으로 구분하여, 일본과 왜를 서로 다른 나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배우는 한국사에는 신라의 위치가 지금의 경상도로 한정되어 있어서 1층에서 9층까지의 나라들과 전쟁할 수도 없다. 전쟁을 하려면 아마도 비행기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게다가 지금도 엄청난 거금이 들어 쉽게 만들기 어려운 황룡사 9층 목탑을 애써 세웠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 위협이 상존했고 간절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신라가 지금의 한반도 경상도였다면 위로는 고구려, 옆으로는 백제만 있는데 굳이 그 큰돈을 들여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을 리가 없다. 이런 이유들로 신라를 한반도 경상도에만 한정한다면 삼국사기뿐 아니라 다른 역사서에 나오는 신라의 역사 해석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한국사 책에서 배우는 것과 달리, 신라가 중국 동부와 한반도에 동시에 존재했다면 역사는 추론과 논리를 통해 쉽게 해석이 가능하다.

이란과 오만 등 이슬람 문화권의 역사책에 보면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기술하고 있으며, 게다가 신라에 와서 매우 행복하게 살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더운 나라에서 온 페르시아를 비롯한 이슬람 사람들이 추운 한반도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더운 중국 남부 홍콩 근처에 있는 광동성이라면 가능하다.

이 지역에는 현재까지도 이슬람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광동성에는 지금도 신라의 삼국사기에 언급된 동일한 지명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지명들이 한반도에는 없다보니 한국 역사책에는 자주 ‘비정한다‘ 즉 추정한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 역사를 축소, 왜곡시키고 있다. 중국은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로 한정한 뒤, 소국이라는 왜곡된 역사주입을 통해 한반도를 자기네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혹시 지금 중국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너무 많아 아무리 중국것으로 둔갑시키고, 재복원이란 명복으로 뜯어 고쳐도, 역사를 바꾸지 않으면 언젠가 한국과 영토분쟁이 발생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물론 한국도 남북한이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혹시 중국은 언젠가 남북한이 하나가 되면 불거질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기만술책은 아닐까?

일본은 의외로 중국과 관련된 역사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에 비해 중국과 한국은 너무도 밀접하게 놀랍도록 연결되어 있다. 언젠가부터 일본은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책에 자신들의 문물이 대륙과 한반도 양쪽에서 들어왔다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지금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에 존재해 있었다는 역사적 지명들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모두 인터넷이 발달한 덕분이다. 당시에 쓰던 한자 지명도 동일하게 지금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간자체 이전에 쓰던 번자체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만약 한국의 현재 역사학계가 식민사관을 버리고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일본 역사교과서에 기술된 말이 맞게 된다. 한국에서만 받았다는 것이 너무 억울했던 일본이 대륙에서도 왔었다는 역사 교과서의 변화된 기록이,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시대에 한국의 재야 및 시민 역사 연구가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역사의 왜곡은 돌고 돌아 언젠가는 제자리로 찾아가는 것일까? 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리가 없다. 수업시간 탐구주제 발표를 통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및 자료 등을 통해 더 알아보고 분석해서 자신의 비판적 사고력을 증명해보기 바란다.


*에듀진 기사 URL: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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