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과서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것들이 우리 생활 주변에 너무 많이 발견된다. 당장 중국에 여행만 가더라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지명들을 확인해보면 알 수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지점들이다. 미국에 영국의 지명들이 많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실제 중국 땅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기록에서 보는 지명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중국발음으로 읽지 말고 한국 발음으로 읽어보면 한국의 지명과 동일한 이름들이 꽤 많이 발견된다. 때로는 한국에는 없는 지명들도 있지만, 우리 고려사나 삼국사기에는 있는 지명들이 존재한다.

한국의 한국사 교과서에는 역사학자들이 잘 몰라서 ‘추정한다’ 또는 ‘비정한다’고 되어 있는 지명이 중국 땅에서 발견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신라의 부산이 아니라 백제의 부산, 백제의 전주가 아니라 신라의 전주도 그렇다.

한반도에서 조선시대 이전 수백 년 동안 존재했던 고려, 신라, 고구려, 백제의 유물과 유적은 조상을 모시던 우리네 풍습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게 발견된다. 하지만 중국에는 한반도에서 찾을 수 없는 수많은 구전과 지명들이 여전히 과거의 이름대로 현재 존재하고 있다.

이같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 ICT의 발달로 인해 더욱 빠르게 확인되고 있다. 현재 한국사 고대사 교수들은 언젠가는 국민들에게 돌팔매를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이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우리는 한 번도 식민사관을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지금은 더더욱 과학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제3자가 쉽게 끼어들기도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털고 가야 한다. 그런 역사적 불행이 뉴라이트를 낳고, 그들이 정권을 잡는 일까지 생기고 급기야는 친일정권이 탄생했으니 우리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정치가 역사를 털고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 정부의 역사관련 예산은 모두 식민사관 학자들에게 집행되고 있으니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하는 고대사학자들도 많다. 그들 스스로가 식민사관 학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민족사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독도는 누구 땅이냐고 물었을 때 한국 땅이라고 곧바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을, 고대사를 연구하는 대학 교수들 중에는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정부 예산으로 한국의 옛 지도를 만들어오라는데도 독도에 점도 찍지 않고 가져와 결국 한국 역사지도를 만들지 못했던 국회에서의 일화는 유명하다.

최근에 불거진 ‘전라도 천년사’ 문제도 그렇다. 일본도 인정하지 않는 일본사 책에 있는 지명이 남원의 옛지명과 비슷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전라도를 고대에 일제 식민지로 전락시킨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 모두는 식민사관학자라고 하지 않고 민족사관을 계승하고 있다는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박사학위를 식민사관을 계승한 학자에게서 받았고 그래야만 대한민국의 역사학 교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국회가 나서야 한다. 식민사관을 주류로 하고 있는 한국 역사학계, 신채호 등 독립애국자들의 민족 역사학계, 이외 시민 역사가들과 함께 동등하게 대우하고 동등하게 연구하는 연구비를 지원하는 특별법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이 길고 긴 질곡의 역사를 끊어낼 수 있다.

최근 들어 유튜브에서 시민역사가들의 등장으로 그동안 민족 역사학계도 잘 몰랐던 또 다른 해석이 등장하고 있다. 차츰 식민사관을 배척하고 역사적 사실에 근접하는 역사학자들의 등장은 한국의 역사를 찾는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시민혁명 출판사대표 겸 시민역사가 유튜버 ‘책보고 양지환’님이 우리 역사의 의문점을 하나씩 해소해 주고 있다. 

여기에 기술된 내용은 우리가 배우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가 아닌 ‘고려사’ 원문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우리의 교과서가 얼마나 사실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식민사관, 즉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기록한 내용을 현재의 한국사 교수들이 그들의 교수였던 일본인들에게서 배운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래 기술된 내용은 모두 고려사에 있는 내용으로 누구든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해보면 확인해 볼 수 있다.

1. 고려 낙타의 기록
고려사에 보면 현재 한반도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현재 한국사 교과서에 의하면 조선시대보다 고려가 작은 영토라고 기록을 해 놓았는데, 진작 고려사에는 황제국, 낙타, 그리고 조공하는 주변국들의 기록들이 많아 놀랍다.

고려가 영토는 작지만 강한 나라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중세의 역사에서는 인구, 토지, 생산력, 그리고 교통로가 국력을 좌지우지 했기에 절대 그럴 수 없다. 

942년 거란이 발해를 무너뜨리고 그 후 고려에게 낙타 50마리를 주었으나, 태조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용서하지 않았고, 낙타를 굶겨 죽였다.

거란은 왜 고려에게 낙타를 주었을까?
또한 고려사에는 낙타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낙타에게 어떻게 먹이를 주고, 관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도 실려 있다. 고려에서 낙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낙타는 실크로드 및 무역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짐꾼이었다. 낙타가 무거운 짐을 운반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려가 육로로 무역을 많이 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2.고려의 위치에 대한 놀라운 기록
우리가 아는 고려는 북한의 평양과 38선 위의 개성이다. 하지만, 고려사에는 이와 다르게 기술돼 있다.

몽고의 원나라와 고려의 국경인 자비령(慈悲),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시대 영토인 사수현(泗水縣), 고려시대 청주(靑州), 제양현 등은 현재 북경과 산동반도 주위에 존재하는 지명들이며, 이들은 현재 한국사에서 어디인지 제대로 해석을 못하는 지역이다. 또한 고려사의 안문관, 평로, 영원성은 중국대륙에 태행산맥 좌측에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지명들이다.

그렇다면 고려의 수도 개경, 서경은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북경 주위이며, 고려가 고구려의 중심지를 계승했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실제로 고려사에는 마한·진한·변한 즉, 삼한을 통일한 고려라고 기록돼 있다.

3.북경과 낙타의 기록
추운지방까지 무거운 짐을 싣고 먼 거리를 이동가능 했던 낙타들, 100년 전의 사진들만 보더라고 북경은 낙타 천지였다.

현재 중국내에는 지금은 한반도에서는 못 만든다는 고려청자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한 양자강 유역의 신라 경덕왕과 이름이 같은 경덕진이 존재하고, 비단장수 왕서방으로 유명한 양자강 유역의 항저우, 그리고 종이 생산의 중심지 하북성이 존재한다.

우리의 도자기, 금으로 치장된 불상, 불화 등, 그리고 이러한 자랑스러운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개발된 금속활자 등은 고려가 단지 작은 국각가 아니었음을 증명해준다.

문화가 발전하려면 교통망이 굉장히 중요하다. 지금처럼 배와 비행기로 전파가 빠르지 못했던 1,000년 전 인구, 생산력, 운하를 이용한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는 북경과 양자강 일대이다.

황하, 회수, 양자강을 따라 물길로 이동하던 무역선들, 그리고 풍부한 농작물을 바탕으로 한 인구성장. 고려의 역사가 500년이나 지속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몽고 즉 원나라가 유일하게 자랑스레 제후국으로 삼았던 데에는 그럴만한 문화며 지위가 있었을 것이다.

4.조선의 건국과 고려 멸망
이성계는 역성왕조이며, 조선이란 나라를 건국했다. 고려의 땅에서 건국한 명나라와 조선, 건국 후 북쪽의 원나라, 또 우측의 여진을 막기 위해 서로 명과 조선은 힘을 합쳐야 했고, 조선은 무역하기 어려운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농업국가로 전락했다. 이는 교통과 생산이 국력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5.과거와 다른 현재
지금은 비행기, 배 등 운송수단의 급격한 발달과 인터넷이라는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기에 한국의 위상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이는 우리선조들의 우수한 DNA가 다중 매체 등을 통해 전세계에 쉽게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난 후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 위의 기술된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해보자. 확인해보는 발걸음이 비판적사고력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위이다.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하고 그 위에서 새로운 역사를 살아가야 우리 청소년들이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어갈 수 있다. 그것이 이 꼭지에서 사실의 역사, 진실의 역사를 연재하는 이유이다.

제목에 있는 고려시대 낙타는 조선시대에 어디에 갔을까에 대한 해답은 한마디로 삶의 주요 장소가 변경됐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청나라 말기 1900년까지 북경에 있었던 낙타가 1900년 당시 한반도 조선에는 없었다.

즉 낙타는 여전히 고려시대처럼 북경에 살고 있지만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 무언가의 이유로 이동했기 때문에 조선에는 낙타의 기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합리적인 추정을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인들이 각색한 그대로 황제나라 고려를 작은 한반도 내의 나라로 받아들여 지금도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이다.


*에듀진 기사 URL: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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