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만 되면 온 나라에서 가장 많이 기억되는 이름 류관순. 그는 소녀의 몸으로 악독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는 이유로 이전부터 ‘조선의 잔다르크’로 불려왔다.

왜 그런 것일까? 17살 때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패색이 짙던 조국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전장에 나섰던 15세기 프랑스의 잔다르크와 반제국주의 민족운동가인 20세기 조선의 류관순을 정밀 비교 분석해 본다.

잔다르크와 류관순은 둘 다 소녀의 몸으로 구국에 나서 민족의 수호자로 승화하는 등 닮은 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17살에 조국의 위난을 보고 떨쳐 일어났다는 점부터 같다. 1412년 프랑스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잔다르크는 17살 때인 1429년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패색이 짙던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전장에 나선다. 1902년 역시 농부의 딸로 태어난 류관순도 17살 때인 1919년 3·1운동에 온몸을 던져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

두 사람은 또 종교적 열정과 정치적 신념을 결합해 어떤 고난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인간상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잔다르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천사장 미카엘의 계시를 받고 전장에 뛰어들었으며, 류관순도 독실한 감리교인으로서 온갖 고비마다 투철한 신앙심으로 헤쳐 나갔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은 또 직관에서 비롯되는 탁월한 정치적 통찰력을 발휘한다. 잔다르크는 (1) 프랑스가 하나님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았으므로 반드시 승리한다. (2) 하나님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역대 프랑스 왕의 대관식을 열던 랭스를 점령해 먼저 대관식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관순은 자신이 왜 그처럼 극한적 비타협투쟁을 벌이는지 이렇게 설명했다. “2천만 동포의 10분의 1만이라도 순국할 것을 결심한다면 독립은 저절로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적국의 탄압을 직접 경험하면서 성장했다. 잔다르크의 고향 동레미라퓌셀은 주민들이 프랑스의 샤를 황태자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으로부터 여러 번 습격·약탈·살인·방화·납치의 피해를 겪었다. 류관순의 경우도 가족들이 세우고 다니던 매봉교회가 의병들을 돕는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여러 번 불태워졌다. 두 사람 다 적국에 붙잡혀 타협을 거절한 채 순국한 점도 같다.

류관순은 비록 잔다르크처럼 직접 전쟁터에 나가 결정적인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이런 유사성 때문에 프랑스쪽의 인정을 받아 파리 잔다르크기념관에 영정이 봉안되기에 이른다. 일본의 일부 교과서도 그를 사진과 함께 ‘조선의 잔다르크’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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