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길

2100여년 전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했다.

“밭에서 농사짓는 것은 (재물을 모으는 데는) 졸렬한 업종이지만, 진나라의 양씨는 밭농사로 주(州)에서 제일가는 부호가 됐다. 무덤을 파서 보물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전숙은 그것을 발판으로 일어섰다. 도박은 나쁜 놀이지만, 환발은 그것으로써 부자가 됐고, 행상은 남자에게는 천한 일이지만 옹낙성은 그것으로 천금을 얻었다.

술장사는 하찮은 일이지만, 장씨는 그것으로 천만금을 얻었으며, 칼을 가는 것은 보잘 것 없는 기술이지만, 질씨는 그것으로 제후처럼 반찬 솥을 늘어놓고 호화로운 식사를 즐겼다. 양의 위통을 삶아 파는 것은 단순하고 하찮은 일이지만, 탁씨는 그것으로 기마행렬을 거느리고 다녔다. 말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대단찮은 의술이지만, 장리는 그것으로써 종을 쳐서 하인을 부르게 됐다. 이것은 한 가지 일에 전념한 결과이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의 ‘화식열전’은 그 규모와 정보, 풍부한 실증 등으로 오늘날의 우리를 감탄시킨다. 특히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진실의 권위마저 갖추고 있어 <사기> 전체의 품격을 드높인다.

화식열전이 보여주는 관점은 매우 탁월하다.

1.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근본은 경제다.
2. 경제는 자유방임주의를 큰 뼈대로 하면서 적절한 국가의 개입을 보완책으로 결합시킨다.
3. 인간의 본성은 부귀를 지향한다.
4. 상업이야말로 인간의 의식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5. 지경학(地經學)도 지정학(地政學)만큼이나 중요하다.
6. 부는 권력, 명예 등 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7. 재테크에서는 시테크도 매우 중요하다.
8. 아껴 쓰고 부지런한 것은 기본이고, 나아가 반드시 기이한 방법을 사용해 부자가 됐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사마천은 노자의 고립주의나 한나라의 중농억상(重農抑商) 가치관을 비판하고 있다. ‘백성들이 제각기 자신들의 음식이나 옷 습속에 만족하며 서로 왕래하지 않으면서도 행복해한다’는 노자의 가치관은 그야말로 ‘근대의 풍속을 돌이키고 백성들의 귀와 눈을 막으려 하는 것’으로서 실행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또 건국 이래 지속적으로 상업억제책을 써온 한나라 조정과 달리 거시적 관점에서 상업 및 상인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지를 표출한다. 한나라에서는 상인의 대두를 견제하기 위해 △인두세 부담 2배로 늘림 △민간에서의 화폐주조 금지 △소금과 철의 전매화 △균수법 실시로 국가 조달 행위를 상인으로부터 지방관리로 이관 △상공업자에 대한 재산세를 일반인의 2.5~5배로 증세 등의 조치를 취했다.

멀리는 2,700여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에 중국에서 이런 식의 부의 증식이 과연 가능할 수 있었을까? 만일 가능했다면 그 배경은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선 일단 전국시대 또는 한나라 초기의 경제 규모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국책>에 실려 있는 저 유명한 합종책의 유세가 소진의 말을 경청해보자.

“제나라 수도 임치의 성 안에 7만호의 가옥이 있고, 각 가옥마다 3명의 장정이 있다고 치면 이 도시만으로도 21만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부유해서 생활에 여유가 있으므로 음악을 듣는다든지, 투계나 개의 경주를 할 수 있는 회장이 갖춰져 있다.

또 쌍륙(雙六·윷놀이 비슷한 도박)이나 축국(蹴鞠·축구 비슷한 놀이)을 하는 곳도 있다. 한길에서는 수많은 마차가 어지러이 붐비어 수레바퀴가 마주 부딪치고, …사람도 집도 모두 풍요해서 의기가 왕성하다.”

실제로 고고학적 연구 결과 임치성의 크기는 서벽 2812m, 북벽 3316m, 동벽 5209m, 남벽 2821m의 크기로 추정된다고 한다. 나아가 당시 임치만이 아니라 위나라의 수도 대량과 온, 조나라의 수도 한단과 형양, 초나라의 완구, 정나라의 양책, 제나라의 설, 연나라의 계와 하도 비슷한 규모의 대도시였다고 한다.

당시 세계적인 규모의 이런 도시는 모두 상업이 발달하고 제철이나 제염 등의 수공업이 번영했다고 전해진다. 청동기나 칠기 등의 제품도 대량 제조돼 판매됐다. 또 전국시대에는 청동기도 완전히 실용적인 그릇이 돼 널리 보급되고, 값비싼 견직물이며 금과 옥 등 가공품도 유통됐다. 도시의 발달과 각종 산업의 융성 그리고 풍부한 인구를 바탕으로 각계각층에서 소봉의 부를 이루는 사람들이 적잖게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식열전’에 숨은 사마천의 처절한 경험
사마천이 ‘화식열전’을 쓴 데는 개인적 경험이 크게 작용했는데, 바로 그 자신이 돈이 없어 처참한 궁형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한나라의 무제 때 흉노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 투옥돼 남성의 성기를 거세하는 궁형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앞둔 때가 있었다.

당시 한나라는 속전제를 채택하고 있어 그가 50만전으로 정해진 속전을 낼 경우 이 형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마천 일가는 한 달의 기한 동안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 50만전은 투옥 직전 대부로 출사하고 있던 사마천으로서는 도저히 마련할 수 없는 거금이었다. 사마천 자신이 쓴 ‘화식열전’의 내용에 비춰보면, 50만전이라는 돈은 소봉의 부를 누리는 부자가 2년 반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금액이다.(지금 돈으로 약 5억원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사마천 집안은 채 20만전도 모으지 못했다. 부인이 집에 있는 솥단지까지 팔아 간신히 5만전을 구하고, 다시 친정 부모님께 사정하고 빌어서 10만전을 추가로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 동료 공경대부들에게도 사정을 호소했으나 ‘천자의 뜻을 거스른 죄수의 가족’이라고 문도 열어주지 않기 일쑤였고, 일부 마음씨 좋은 공경대부도 몇 천전 정도 빌려주며 등을 떠밀었다고 한다.

이런 처절한 경험이 있었기에 사마천은 돈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고, 돈과 관련된 세상의 인심도 포착할 수 있었다. 그가 ‘화식열전’에 쓴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여들고, 모두 이익을 위해 분명히 떠난다”는 글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의 말 중에는

“물건값이 싸다는 것은 장차 비싸질 조짐이며, 값이 비싸다는 것은 싸질 조짐이다.”

“△식량 △자재 △제품 △산과 택지의 4가지는 백성들이 입고 먹는 것의 근원이다. 이 근원이 크면 백성들은 부유해지고, 그 근원이 작으면 백성들은 가난해진다.”

“빈부의 도란 빼앗거나 안겨주는 것이 아니다. 교묘한 재주가 있는 사람은 부유해지고, 모자라는 사람은 가난한 것이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여들고, 모두 이익을 위해 분명히 떠난다.”

“관직의 지위에 따라 받는 봉록도 없고, 작위에 봉해짐에 따라 받는 식읍의 수입도 없으면서 이런 것을 가진 사람들처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소봉(素封·무관의 제왕 정도로 의역할 수 있음)이라고 한다.”

“만일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고 처자식은 연약하고 명절이 되어도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지 못하며 옷을 입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우면서도 이런 것들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면, 비할 바 없을 만큼 못난 사람이다. …오랫동안 가난하고 천하게 살면서 인의를 말하는 것만을 즐기는 것 또한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대체로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길에는 농업이 공업만 못하고, 공업이 상업만 못하다. 비단에 수를 놓는 것이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것만 못하다. 말단의 생업인 상업이 가난한 사람들이 부를 얻는 길인 것이다.”

“부유해지는 데는 정해진 직업이 없고, 재물은 정해진 주인이 없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기왓장 부서지듯 흩어진다. 천금의 부자는 한 도읍의 군주와 맞먹고, 거만금을 가진 부자는 왕과 즐거움을 같이한다.”

믿기 어려울 만큼 2100여 년 전 사람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가? ‘물건 값이 싸다는 것은 장차 비싸질 조짐이며, 비싸다는 것은 싸질 조짐이다’라는 말은 그 시대 사마천이 이미 애덤 스미스의 수요·공급의 법칙과 비슷한 개념을 알고 있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 아니,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요즘 주식투자의 철칙을 말하는 듯하다.

‘소문에 사고 뉴스에 팔아라’ ‘백성들이 먹고 입는 것의 근원이 크면 백성들은 부유해지고, 작으면 가난해진다’는 말은 그대로 성장과 분배에 관한 파이 이론을 연상시킨다. 저 유명한 ‘파이를 키워야 분배의 몫도 커진다’는 것이 그 표현이다.

 

소봉(素封, 무관의 제왕 정도로 의역할 수 있음)과 화백!(화려한 백수)
여기까지 놀라지 않은 사람도 사마천 시대의 ‘소봉’(素封·)과 오늘날의 ‘화백’(화려한 백수)을 비교하면 놀라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으리라. 사마천 시대의 소봉은 이런 부를 가진 사람을 말했다.

△말 50마리를 키울 수 있는 목장(또는 소 167마리나 양 250마리를 키울 수 있는 목장이라도 좋다)
△돼지 250마리를 키울 수 있는 습지대
△1천 마리의 물고기를 양식할 수 있는 연못
△안읍의 대추나무 1천 그루
△강릉의 귤나무 1천 그루
△하나라의 옻나무 밭 1천묘
△생강과 부추 밭 1천묘

…이런 사람들은 관직에 나가지 않아도, 작위를 받지 않아도 계속 안정적으로 풍부한 수입이 들어왔다. 왕이나 제후, 장군이나 재상을 크게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저잣거리를 기웃거릴 필요도 없고, 다른 마을에 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수입만 기다리면 된다.

오늘날의 ‘화백’은 ‘화려한 백수’의 준말이다. 벌어들인 돈으로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해 평생 쓸 만큼의 재산을 형성해놓은 사람들이다. 따로 직장을 나가는 것도 아니라서 겉보기에 백수 같지만, 부동산 임대료 수입을 시작으로 주식 배당금, 부동산 시가 상승에 따른 자산 증식, 금융소득, 그 밖의 종합소득 등 엄청난 고소득을 올린다. 그야말로 ‘현대판 소봉’인 것이다.

 

직업의 귀천을 뛰어넘는 진보성
그러면서도 이 사회에선 이른바 상도라는 것이 엄연히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에 따르면 당시 교통이 발달한 대도시에서의 상업은 대략 연 20%의 이익을 적당한 마진으로 보았다. “한 해에 술 1천독, 식초나 간장 1천병, 소나 양, 돼지의 가죽 1천장, 쌀 1천가마, 땔감 1천수레, 목재 1천장, 구리 그릇 1천개. 말 200마리, 소 500마리, 단사(수은) 1천근, 무늬 있는 비단 1천필, 누룩 1천홉, 말린 생선 1천섬, 절인 생선 1천균, 밤 3천섬, 여우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 1천장 등(모두 100만전이 본전)을 팔면 20만전의 이익을 얻는다. 아니면 현금 1천관(100만전)을 중개인에게 빌려주고 2할의 이식을 받아도 좋다. …다른 잡일에 종사하면서 2할의 이익을 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재물을 활용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나아가 사마천은 당시 소봉을 이룩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며 직업의 귀천을 뛰어넘는 진보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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