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독립을 원한다

빛을 되찾은 날’, 8월 15일 광복절은 일제로부터의 민족 해방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날이에요. 광복절 하면 떠오르는 유관순 열사, 안중근의사, 윤봉길 의사 등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있는데요. 그 외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숨은 독립 영웅들도 정말 많답니다.

오늘은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안윤옥’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도 유명한 남자현 지사의 일대기를 만나볼텐데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무장투쟁을 통해 조국의 독립에 몸을 던져 ‘혁명의 어머니’로도 불리는 남자현 지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20년을 기다린 복수 

남자현 지사, 1897년 무렵 갓 태어난 아들을 안고 시댁식구들과 찍은 사진
남자현 지사, 1897년 무렵 갓 태어난 아들을 안고 시댁식구들과 찍은 사진

1872년 태어난 남자현 지사는 19살에 남편과  혼인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며 단란한 생활을 했지만, 조선을 장악한 일제의 만행이 점차 극성을 부리는 때였죠. 남편은 1896년 자현에게 “나라가 망해가는데 어찌 집에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의병으로 나섰답니다.

하지만 신혼의 단 꿈과 사랑하는 아내를 뒤로하고 떠난 전장에서 자현의 남편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자현은 임신 중이었는데, 아이가 생긴 것을 알리기도 전 일제에 의해 남편을 잃고 만 거예요.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들은 자현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나라의 적이 이제는 나의 원수가 되었다. 이제는 저놈들과 하늘을 함께 하지않겠다”라고 맹세했죠.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괴로운 밤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나 자현에게는 지켜야 하는 아들이 있었고, 봉양해야 하는 홀시어머니가 있었어요.

그는 양잠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나갔고, 자현이 힘들게 번돈은 생활비와 독립운동자금이 됐어요. 나라의 독립도 중요했지만 엄마로서의 의무도 중요하게 생각한 자현은 독립운동을 도우며 아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24세가 되던 1919년, 3.1 만세 운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길에 뛰어든 자현은 독립군들이 일제에 활발하게 항전하던 만주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독립군의 어머니' 가 된 날 

자현은 아들과 함께 상인의 행색으로 변장을 한 채 만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나는 절뚝거린 역사를 청산하고 그릇된 것을 바로잡으며 살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떠난다. 나는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기러 간다.”라는 각오를 전했습니다.

어렵게 도착한 만주에서도 자현은 닭을 키우고, 농사를 짓고, 인근 농장에서 일까지 하며 돈을 벌었어요. 언제 어디서 폭력과 죽음이 덤빌지 모르는 불안한 삶 속에서도 독립 자금을 모아 독립군을 도우려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현은 20개가 넘는 여성 교육기관을 세우며 교육에도 집중했죠. 기관을 통해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의 중요성을 가르쳤고, 여성도 독립투쟁 활동을 해야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투에서 쫓기던 독립군 10여 명이 우연히 자현의 집으로 숨어들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자현의 아들 뻘인 어린 청년들이었는데요. 자현은 이들을 숨기고 정성껏 돌보았어요.

동상에 걸려있던 그들의 몸을 닦고 안마를 해준 뒤 따뜻한 방으로 옮겨 음식을 대접했죠. 병사들은 친어머니처럼 자신들을 돌봐준 자현의 배려와 보살핌에 눈물을 흘렸어요. 이날 이후 자현은 독립군으로부터 ‘어머니’라고 불리기 시작했답니다.


스스로 자른 손가락, 세번의 혈서 

이 무렵 만주에서는 독립군과 독립운동 단체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동포 간의 갈등이 너무 안타까웠던 자현은 1920년, 기념대회로 모인 1천여 명 앞에서 왼쪽 엄지를 잘랐습니다. 화합을 호소하기 위해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을 질타하는 혈서를 쓴 그의 희생 앞에 사람들은 깊은 감명을 받아 오열했어요.

하지만 1922년에도 갈등은 여전했고, 독립군 간의 유혈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소식을 들은 자현은 또 한 번 검지를 잘라 독립운동계의 단결을 호소하는 혈서를 쓰게 돼요.

독립군들은 잘못을 뉘우치며 화합을 다짐하는 합의문을 발표했는데요. 사람들은 두 개의 손가락을 자른 자현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를 ‘세 손가락의 여장군’으로 불렀습니다.

1932년, 자현은 또 한 번 손가락을 자르게 됩니다. 일본이 만주에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을 세운 것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국제연맹 조사단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인데요.

자현은 국제사회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잘라 ‘조선의 독립을 원함(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썼습니다.

자른 손가락과 혈서, 여성들의 독립운동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조사단 측에 전하려 했지만 결국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뺏기고 말았어요. 이제 자현의 왼손에는 2개의 손가락만이 남아있었지만, 어떤 것도 그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방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리라" 

1933년, 자현은 예순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일본의 만주국 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려는 거사를 계획했습니다. 일본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중국풍의 옷을 입었지만 무기를 지닌 채 하얼빈을 지나다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어요.

자현은 다섯 달이 넘는 오랜 기간 잔혹한 고문과 심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 후에는 쇠약해진 몸으로도 ‘적이 주는 것은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겠다’는 각오로 단식을 결행했는데요. 단식 기간이 열흘을 넘어서고 자현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일제는 그를 풀어주었습니다.

자현을 찾은 동료들이 쇠약해진 그에게 식사를 권했지만 자현은 “사람이 먹고사는 것은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 달려 있다.”라는 말로 답을 대신할 뿐이었죠.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헤매던 그는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유언을 남긴 채 8월 22일 숨을 거뒀습니다.

여성의 외출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 남지현 지사는 억압의 굴레를 깨고 일어났을 뿐 아니라 목숨을 바쳐 죽는 날까지 독립운동가로 살다 떠났습니다. ‘혁명의 어머니’로 불렸던 남지현. 정부는 남지현 지사를 1962년 여성 항일 운동가로서는 최초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하며 그의 공훈을 기렸습니다.

*에듀진 기사 URL :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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