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 정도전을 제거하다 
- 방과가 왕이 되고 태조는 상왕으로 물러나다 
- 정종의 사병 폐지와 군사권 일원화 
- 이방간의 2차 왕자의 난, 이방원에 제압당하다 

1398년 태조 7년,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태조가 조선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자신을 권력에서 소외시키고, 이복동생을 세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난을 일으킨 이방원은 자신이 아닌 형 이방과를 왕으로 세우고, 태조를 상왕으로 물러나게 했다. 이방원이 정권을 잡은 것에 불만을 품은 넷째 아들 이방간은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이방원에게 제압당했다. 이후 아버지 태조도 이방원 제거를 내세운 조사의의 반란군에 합류했으나 반란은 실패하고 만다. 

이방원이 아무리 절대권력을 갖고 있었다 해도, 그가 벌인 무자비한 행위들이 낱낱이 기록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조선 초기, 지금부터 권력의 냉엄함을 느낄 수 있는 태조~태종실록 속으로 들어가 보자. 

1차 왕자의 난과 정종의 즉위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 정도전을 제거하다 
태조가 재위 7년째인 1398년 8월 병으로 몸져눕게 되자, 정도전은 왕자들에게 “태조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피접을 가야 하니 모두 들어와 보라”라는 전갈을 보냈다.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이방원은 셋째 형 이방의, 넷째 형 이방간, 아버지의 이복동생 이화, 이제(신덕왕후 강씨의 딸 경순공주의 남편) 등과 근정문 밖의 서쪽 행랑에 모여 숙직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이방원의 부인 민씨(훗날 원경왕후 민씨)의 남동생 민무구는 ‘정도전, 남은 등이 동대문 밖에 있는 송현동 남은의 첩 집에서 일이 성사되기를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이를 전해 들은 민씨는 종에게 은밀히 이 사실을 이방원에게 전했다. 

이방원은 집에 군사를 대기시켰다. 이들은 사병이 해체되기 전 방원의 부인 민씨가 숨겨 두었던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민씨는 방원에게 궐기할 것을 권하며 스스로 갑옷을 입고 나서려 했다. 그렇게 이방원의 군대는 광화문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남산까지 군대가 들어 찼다는 소식을 들은 세자 방석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런데 이는 사실 이방원이 수하들에게 광화문과 남산에서 횃불을 흔들어 허장성세(虛張聲勢)하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일부 병력은 정도전 제거에 나섰다. 반란군은 정도전이 가 있는 남은의 첩 집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정도전과 남은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정도전은 전 판서 민부의 집에 숨어 있다가 민부가 고발하는 바람에 죽고 만다. 남은은 자진해서 나오다가 죽었다. 

세자 방석과 한 살위의 형 방번은 강제로 궁 밖으로 불러내 자객을 시켜 죽였다.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도 정도전 일파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실록에는 “정도전이 목숨을 구걸하며 비굴한 최후를 맞았다.”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목이 베이기 전에 지었다는 시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 조심하고 또 조심해 살면서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업적
송현방 정자에서 한 잔 술에 허사가 되었네 ”

정도전은 이방원 세력에 의해 철저히 간신으로 그려졌고,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 그려졌다. 정권을 잡은 이방원에게 필요한 것은 재상 정치가 아니라 충신의 보필이었기 때문이었다. 손을 마주 잡았던 어제의 동지가 역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충신이 되는 것이 바로 역사다. 

정도전은 흥선대원군 때에 와서야 역적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정도전은 재상 중심 정치를 추구했다. 늘 인품과 능력이 훌륭한 왕이 나올 수 없으므로 당대의 뛰어난 신하가 직접 정치를 관장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영국의 입헌 군주제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정도전의 재상 중심제는 ‘우리식 입헌 군주제’를 시험할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지만, 왕자의 난으로 말미암아 결국 이상에 그치고 만다. 

방과가 왕이 되고 태조는 상왕으로 물러나다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던 날,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영안군)는 태조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어느 쪽에도 휘말리기 싫었던 방과는 김인귀라는 자의 집에 몸을 숨겼다. 

반란군 세력은 이방원을 세자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방원은 형인 방과를 세자로 내세웠다. 이방과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적은 정안군(이방원)이 세웠는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거절했다. 

하지만 방원이 “적장자가 세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반란의 명분을 내세우는 바람에 결국 방과(훗날 정종)가 세자로 책봉됐다. 정종의 정실부인 정안왕후 김씨는 결혼한지 오래됐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는데, 김씨가 적자를 낳을 수 없다고 본 이방원은 정종에게 잠시 왕좌를 맡겨 놓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난이 벌어진 지 8일 후 태조는 세자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리고 상왕이 된 후에도 상당 기간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정종의 사병 폐지와 군사권 일원화 
조선의 제2대 왕 정종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동생 방원의 양보로 즉위했으므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은 스스로 재상이 돼 주요 정책을 결정했다. 따라서 정종 때의 정치는 거의 이방원의 뜻에 따라 전개됐다. 심복인 이숙번을 왕의 비서관인 우부승지에 앉혀 정종을 감시하기까지 했다.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골육상쟁이 떠올라서였을까?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난 지 6개월 정도 지난 1399년(정종 1년) 3월, 정종과 이방원은 새로운 도읍인 한양을 버리고 옛 도읍인 개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개경으로 떠나는 날 상왕은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을 둘러보면서 “한양으로 옮긴 것이 나만의 뜻이었는가?”라며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조선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개경 사람들은 “형제간의 싸움으로 5년도 안 돼 돌아왔다. 이성계는 명당이라는 한양으로 갔다가 마누라에 두 아들과 사위까지 잃고 돌아왔다.”라며 비아냥거렸다. 

정종은 이방원의 의사를 반영해 왕족, 권신 등이 거느리던 사병을 폐지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에 집중시켰다.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의흥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당시 사병은 신변 보호와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개인 무력 집단이었다. 대다수 신하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이방원의 사병 혁파에 불만을 품었다. 제1·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공신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정몽주를 살해한 조영무와, 이성계·이방원과 겹사돈을 맺은 이거이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쏟아 냈다. 조영무는 무기를 거두러 온 장교를 두들겨 패기도 했다. 하지만 정종은 곧 두 사람을 유배 보내고, 사병을 모두 국가 병력에 흡수했다. 

이방간의 2차 왕자의 난, 이방원에 제압당하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이방원이 실권을 장악했지만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던 형제들은 위협적인 존재였다. 태조의 셋째 아들 이방의는 권력에 뜻이 없었으나 넷째 아들 이방간은 적자임을 내세워 은근히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때 이방원의 부관 출신 박포가 방간 앞에 나타나 방간을 부추겼다. 원래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인물로, 당시 “정도전이 이방원을 죽이려 한다”라고 사전에 정보를 제공해 거사가 성사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박포는 자신이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등과 함께 2등 공신에 책봉된 것에 늘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방원에게 정도전의 모든 행보를 알려 준 변절자 이무와, 별다른 공이 없는 조준이 정략적으로 1등 공신에 책봉된 데 대해서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박포가 눈치 없이 불평을 늘어놓고 다니자 이방원은 박포를 귀양 보냈다. 

그런데 유배에서 풀려난 박포는 이번엔 방간 앞에 나타나 “이방원이 대군(이방간)을 죽이려 한다. 선제공격하면 비록 군사가 약하더라도 제압할 수 있다.”라고 이간질했다. 

1400년(정종 2년) 1월 방간은 사냥하는 척하며 사병을 동원해 개경으로 진군했다. 정종과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 “방원이 저를 해치려 하므로 거병했습니다.”라고 고하면서 말이다. 정종과 태조는 방간을 만류했다. 그러나 방간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했고 방원과 개경 한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하지만 방간은 방원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방원은 형제를 죽였다는 비난을 피하고자 “형님에게 화살을 쏘는 자는 엄하게 벌하겠다.”라고 병사들에게 당부했다. 결국 무모한 싸움을 건 방간은 붙잡혀 유배에 처해졌고, 박포는 주범으로 몰려 처형됐다. 

셋째 이방의는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병중이었다. 그리고 방간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 명부를 삼군부에 바쳐 자신은 정치에 아무 미련이 없다는 뜻을 비쳤다. 방간과 방의가 물러난 상황에서 방원이 사실상의 적자가 되었다. 

정종은 상왕 이성계의 허락을 받아 방원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런데 정종의 동생인 방원이 왜 세제(世弟,임금의 아우)가 아닌 세자(世子)로 책봉됐을까? 방원은 아버지 자신을 태조의 세자로 자처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종이 죽은 후에도 공정왕이라고 불렀을 뿐 묘호는 정하지 않았다. 정종이라는 묘호는 숙종 때 가서야 정해졌다. 

*자료 제공=리베르스쿨

- 이 기사는 '나침반 36.5도' [인문 다이제스트]에 실린 내용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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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진 기사 URL :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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