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상왕 이성계, 반란군에 합류하다 
- 태종,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다 

*사진=경복궁 경회루
*사진=경복궁 경회루

1398년 태조 7년,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태조가 조선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자신을 권력에서 소외시키고, 이복동생을 세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난을 일으킨 이방원은 자신이 아닌 형 이방과를 왕으로 세우고, 태조를 상왕으로 물러나게 했다. 이방원이 정권을 잡은 것에 불만을 품은 넷째 아들 이방간은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이방원에게 제압당했다. 

이후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골육상쟁인 두 차례 왕자의 난으로 혼란스러웠던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태상왕 이성계, 반란군에 합류하다 
1400년(정종 2년) 7월 세자 이방원은 태조의 존호를 태상왕으로 올렸다. 태조 이성계는 세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조영무(이성계의 사돈), 조온(동북면의 휘하 장수), 이무(정도전의 휘하)는 나를 배신하고 너에게 붙었다. 앞으로 또 배신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라며 처벌을 요구했다. 

이방원은 정종에게 청해 이들을 유배 보냈다. 그러나 머지않아 다시 불러들였다. 이를 통해 태상왕은 자신이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임을 절감했다. 

정종은 재위 기간에 격구를 즐기는 등 정치에 뜻이 없음을 보이며 이방원을 안심시켰다. 정종은 즉위한 지 2년 만인 1400년 11월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이 된 정종은 태종의 배려로 인덕궁에 머물면서 사냥, 격구, 연회, 온천 여행 등으로 세월을 보내다 1419년(세종 1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개경의 민심은 더 험악해졌다. “태상왕을 내쫓고 동생들을 죽이더니 결국 왕이 되었다. 태상왕을 배신한 신하들도 똑같은 사람들이다.”라며 누구나 한마디씩 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개경에서 벗어나 금강산, 소요산, 오대산 등 이름난 산과 큰 절을 찾으며 마음을 달랬다. 개경의 조정은 민심을 의식해서인지 태상왕의 행차를 말릴 수 없었다. 소요산 절 옆에는 아예 거처할 궁까지 지었다. 

태종이 직접 소요산까지 찾아와 귀경할 것을 청했지만 태상왕은 “두 아이(방번과 방석)와 사위(방원에게 죽은 경순공주의 부마 이제)가 공중에서 ‘저희는 서방 정토로 가고 있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내가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느냐.”라며 태종의 손을 뿌리쳤다. 

1402년 가을 태상왕은 임진강 근처에서 명나라로 돌아가는 사신을 맞이해 잔치를 베풀었다. 태종은 최정예 부대인 별시위를 보내 태상왕을 호위하게 했다. 명 사신이 떠난 후 태상왕은 “이참에 조상의 능을 참배하러 동북면에 다녀올까 한다.”라며 별시위에게 계속 호위해 달라고 요청했다. 

별시위 군사들은 “태종의 명을 받지 못했다.”라며 머뭇거렸으나 태상왕이 “너희는 내가 키운 군사가 아니더냐.”라며 호통 반, 애원 반으로 종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태상왕은 왜 갑자기 군사를 끌고 동북면으로 향했을까? 안변 부사 조사의에 대한 11월 5일 자 실록의 기록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태상왕은 신덕왕후 강씨의 척속인 조사의를 매우 총애했다. 

조사의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당으로 몰려 하옥됐다 곧 풀려난 인물이다. 조사의가 신덕왕후 강씨의 복수를 명분으로 거병하자 주변 고을에서 호응해 반란군이 점차 늘어났다. 태상왕이 내응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주변 수령들을 설득하기 위해 박순을 파견했으나 반란군에게 살해됐다. 태상왕을 회유하기 위해 이서와 설오대사를 보냈지만 반란군에 가로막혀 되돌아온 일도 있다. 선발 부대인 이천우 부대가 조사의 군대에 패하자 태종은 장인인 민제에게 개경 수비를 맡기고 직접 출정했다. 태상왕은 조사의와 합세한 것이다. 

처음에는 반군이 우세해 관군의 선봉 이천우를 격파했다. 조사의는 병사를 평안도 덕천, 안주 방면으로 이동했고, 평안도 군사까지 합세해 군사는 만 명으로 늘어났다. 태종은 당황했지만 정예군 4만 명을 동원해 전면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한판 싸움은 시시하게 끝나 버린다. 포로로 잡힌 김천우가 “4만이 넘는 관군에게 어찌 맞서겠느냐.”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조사의의 병사들에게 퍼진 것이다. 겁을 먹은 병사들이 불을 지르고 도망치면서 하룻밤 사이에 조사의 부대는 와해됐다. 

1402년 11월 청천강에서 관군과 싸움이 벌어졌으나 조사의가 이끄는 반란군은 대패했다. 관군에 사로잡힌 조사의는 12월 도성으로 압송되었다가 참수됐다. 

*사진=함흥 본궁
*사진=함흥 본궁

태상왕 이성계와 함흥차사 
반란군을 뒤에서 조종했던 태상왕 이성계는 여러 명산을 돌며 아들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태상왕이 함흥에 머무르는 것은 태종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므로 태종은 어떻게든 태상왕을 개경으로 모셔 와야 했다. 

이때 유래된 말이 바로 ‘함흥차사(咸興差使)’다. 함흥차사는 흔히 ‘심부름을 가서 오지 않거나 늦게 온오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태상왕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함경남도 함흥)이나 소요산(경기도 동두천)에 머무를 때, 그를 모시러 갔다 사신이 죽어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야사에서는 태상왕 이성계가 태종이 보낸 차사들을 모두 죽였다고 전하지만 실제로 죽은 인물은 박순이 유일하다. 

태종,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다 
태종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개국 공신 세력을 몰아내고 34세 때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자 신권의 상징이었던 의정부 서사제 대신 6조 직계제를 채택했다.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안을 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게 해 의정부의 삼정승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힘을 약화한 것이다. 

나아가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했고, 승정원과 의금부를 설치해 왕권 강화를 위한 핵심 기구로 삼았다. 또한 공신이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고 의흥삼군부로 병력을 집중했다. 

태종은 세금과 군역을 확보하기 위해 양전 사업과 호구 파악에 노력했고, 양인의 수를 확보하기 위해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호패를 가지고 다니게 하는 호패법을 시행했다. 또 사찰이 보유한 막대한 토지와 재산을 국고로 환수했고, 억울한 노비를 조사해 해방함으로써 사찰의 경제적 기반을 축소했다. 

호구 조사, 호패법 시행, 사찰 노비의 해방은 군사력과 왕권을 강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태종은 유교 윤리에 따른 법제도 정비했다. 조준의 책임으로 편찬된 <경제육전>의 내용을 간략하게 하고 법례가 될 부분을 모아 <속육전>을 만들었다. 

서얼 출신에게 문과 응시를 금지하는 서얼 금고법을 시행하고, 서얼 출신이 무과나 잡과를 통해 관직에 올라도 승진에 한계를 두는 한품서용법을 두었다. 또한 부녀자의 재혼을 금지하고 재가해 낳은 자식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도록 했다. 능력보다는 출신을 우선시하는 서얼 차별은 태종이 만든 대표적인 악법이다. 

세자 시절부터 추진하던 태종의 개혁 정치는 상왕으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됐다.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한 태종은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원경왕후의네 동생들을 제거하기도 했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기 전 양녕대군이 방탕한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세자를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 도를 세자로 삼았고 2개월 후 세자에게 양위했다. 

‘조선판 미켈란젤로’ 박자청이 남긴 세계문화유산
1405년(태종 5년) 10월 태종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 왕자의 난을 겪은 경복궁을 피하고 새로 건설한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창덕궁을 건축한 책임자는 평민 출신으로 태종의 눈에 들어 공조판서까지 오른 박자청이다. 

궁궐 내의 건축 사정에 밝았던 박자청은 1405년(태종 5년) 창덕궁을 창건할 때 제조를 맡게 된다. 태종은 박자청에게 도성 대부분의 건설 공사를 맡겼다. 창덕궁과 종묘는 물론이고 경복궁 경회루, 헌릉, 성균관 등 수많은 곳에 박자청의 손길이 닿아 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궐을 만든 조선의 미켈란젤로였다. 박자청과 공사를 함께한 이름 없는 백성들은 창덕궁, 종묘, 조선 왕릉이라는 세계문화유산을 우리에게 남겼다. 

*자료 제공=리베르스쿨

- 이 기사는 '나침반 36.5도' [인문 다이제스트]에 실린 내용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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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진 기사 URL :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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