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빨지 못한 빨래 때문에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의 옷을 바삐 주워 입고 온 날

사람들은 아무도 내 몸의 더위를 알아보지 못해

나는 그야말로 몸이 더워 죽겠네

 

순전히 계산 착오

아니면 가진 옷이 한정되어 있어서

미리 준비하지 못한 건 결례

 

잘못된 결혼이나

잘못된 악수나 선택한 직업도 마찬가지

놓친 그 남잘 잡는 거였는데

놓친 그 길을 걸었어야 한 건데

   
 

하루를 견디기 힘든 두꺼운 옷은

단 하루만의 반성을 제공할 뿐

평생 견디기 힘든 두꺼운 옷가지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

그런 직업

그런 부부

그런 동업자를 생각하면

 

두꺼운 옷은 이미 옷이 아니라 숨통을 조르는 것

서로를 죽이는 것

 

판단이 흐릴 때

생각이 희미할 때

서서히 현기증이 날 듯 죽어가고 있는

두꺼운 옷 속의 사연들

 

식탁이든 사무실 책상이든 옷을 입는 사물은

제 몸에 맞는 가벼운 옷가지를 그리워하며

두꺼운 옷을 속 시원히 바닥에 벗어던지고 싶겠지

 

하늘에 뜬 새처럼

바다로 가는 강물처럼

 

〔詩作 노트〕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알맞게 일을 맡는 것이 좋은데,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병나는 경우가 많다. 발에 신발을 맞추어야 되는데 신발에 발을 맞추는 격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다. 좋은 대학, 좋은 옷, 돈과 권력, 분에 넘치는 명예, 모두 허상이다. 자신이 처한 처지를 잘 파악하고 분에 넘치는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마음도 편안하고 삶도 행복해질 것이다. 자기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시인 하재일
충남 태안 출생. 1984년 문단에 등단한 이후 시집으로 <아름다운 그늘>, <선운사 골짜기 박봉진 처사네 농막에 머물면서>, <달팽이가 기어간 자리는 왜 은빛으로 빛날까>, <타타르의 칼> 등을 출간. 현재 고양시 화정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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