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오’는 ‘땅을 넓힌다’의 뜻이며 ‘오’는 ‘삼족오’의 ‘오’로서 태양을 상징
- 진 시황, 한나라 유방, 치우 천황에게 제사를 지낸 이유
- 황제헌원이 왕이 되지 못하고 그의 아들 소호금천이 왕이 된 이유
- 김씨가 중국에서 온 성씨가 아니라 한반도에 사는 김씨일 뿐
현재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현재의 역사가들이 만든 것이다. 신시 배달, 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열국의 역사는 모두 같은 조상을 모셨기에 우리가 지금 한 뿌리라고 역사가들이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역사에서 삼국 이외 7국은 기술하지 않고 있으며 단군 조선의 역사 또한 부정하고 있다. 현재 교과서를 만든 집단, 즉 대학의 고대사 역사학자들은 조선과 신시배달 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우리 세금으로 운영되는 동북아역사재단과 수많은 역사 관련 단체들은 너무도 당연한 독도 또한 한국땅이 아니라고 우긴다. 뒤틀린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뒤틀린 역사관을 우리는 식민사관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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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 천왕은 동이 구리국의 천자이다. 또한 묘족이 조상으로 모시는 분이다. 하늘 천이라는 글자는 당시 아무나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치우 천왕은 신시의 제왕인 환웅의 한 분으로서 우리의 발음으로 ‘자오지 환웅’이라 하는데, 18분 환웅 가운데 그 족적을 많이 알 수 있는 분이며, 나머지 17분은 그 이름만 전해올 뿐 그 외에는 알 수가 없으니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자오지’ 명칭에서 ‘자오’는 ‘땅을 넓힌다’의 뜻이며 ‘오’는 ‘삼족오’의 ‘오’로서 태양을 상징하는 말이다. 또‘o’나 ‘u’는 ‘위’ 또는 ‘키우다’등의 의미가 있다. 뒤에 붙이는 ‘지’는 ‘치’로 변하기 전의 소리로서 ‘이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cha’나 ‘chi’는 ‘군사의’ 라는 의미로 옛 만주·몽골어이다. 따라서 ‘자오지’란 ‘군의 우두머리’, 군사적으로 확대된 ‘군신軍神’을 의미하는 이름인 것이다. 허나 치우(蚩尤)라는 글자의 한자 뜻을 우리는 어리석다는 ‘치’와 심하다는 ‘우’로 잘못 해석하며, 우리의 대영웅을 스스로 비하하고 있다.
치우 천왕의 실체를 우리 국민들은 잘 모르는데, 이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4천 5백 년 만에 우리 곁에 갑자기 나타났었다. 우리 축구 국가 대표팀에게 전략과 용병술로 말이다. 때는 월드컵 경기가 2002년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던 역사적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선수들은 붉은 유니폼을 입고 투지와 전술로 싸웠으며, 온 국민은 ‘붉은 악마’가 그려진 새빨간 상의를 입고 혼신을 다해서 응원했다.
도깨비처럼 뿔이 두 개나 달렸고 무서운 얼굴의 이 붉은 악마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매우 낯선 이 귀신이 바로 치우 천왕이었다. 당시 누가 치우 천왕을 알고 또 그렇게 군사의 신답게 형상을 잘 디자인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고맙다.
치우 천왕에 대해서는 쇠와 구리를 써서 병장기를 만든 것과 공손 헌원씨와 끝없는 전쟁을 하였다.『삼성기』라는 우리의 기록을 보면 치우 천왕은 ‘신과 같은 용맹이 뛰어나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며 세상을 다스렸다’고 하였다.
또 ‘광석을 캐고 쇠를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놀라 크게 두려워 하였다’고 했다. 여기의 ‘구리 머리와 쇠로 된 이마(銅頭鐵額)’에 대하여 『규원사화』에서는 치우 천왕이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여 그리 묘사한 것이라고 하였다.
『세본(世本)』「작편(作篇)」과 『규원사화』에는 ‘치우가 5가지 병기를 발명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치우가 금속을 사용하여 무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치우가 당시 다른 부족에 앞서 먼저 선진적인 병기를 발명한 사실은 『관자(管子)』「지수(地數)」편에도 나와 있다.
“치우는 갈로산에서 흘러나오는 금속수를 이용하여 검(劍), 개(鎧), 모(矛), 극(戟)을 제조하고, 큰 활과 호목나무 화살 등을 많이 만들어, 탁록, 구혼에 올라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서 세상의 만민이 두려워 엎드리고 그 위세는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한 해 만에 9개 제후국가를 겸병하였다. 또 옹호산에서 흘러나오는 금속수를 이용하여 장과, 단과, 끈 달린 방패를 제조하고 새로 병사를 정비하고 양수, 공상에서 한 해 만에 다시 12개 제후국을 합병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흐르는 물속에 양털을 담가두면 사금, 사철이 달라붙게 되는 원리를 활용하여 나중에 양털을 말려서 금속을 분리해내었던 것이다.
무기 극이란 끝이 갈라져 있는 가닥창으로서, 백적(白狄)의 중산 선우국(單于國)의 특이한 형태의 창을 보면 생김새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3가닥으로 갈라진 특이한 형태의 무기는 고구려에도 등장한다.
고구려의 무기는 갑옷과 쇠뇌, 활과 화살 뿐만 아니라 끝이 갈라진 창, 긴 창, 짧은 창 등과 정련하지 않은 동철이 있었다. 또 조선시대에 포졸들도 삼지창을 들었다. 즉 서기전 2,700년 치우 천왕의 동이 구리국에서 시작된 청동 및 철기 제조기술은 후대 그대로 이어져, 금은입사 향로, 상감 환두대도 등 전 세계적으로 차별적인 금속가공 기술이 접목된 명품을 낳게 된다.
치우 천왕의 군대는 막강하여 적수가 없었다. 형제와 종실의 무리 가운데 장군으로 삼을 만한 사람 81명을 선발하여 부장으로서 모든 군사를 통솔케 하였다. 그런데 공손 헌원이 계속 도발해 와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공손씨가 이렇게 신시에 도전한 이유는 그의 선조가 신시로부터 벌을 받아 헌구로 추방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는 산서성 남부에 전쟁터 진(鎭)의 명칭이 매우 많은데 소금이 나는 염지를 쟁탈하고자 쳐들어 온 것으로 보고 있다. 혹은 당시 공손씨는 신농씨의 후계자로 제위를 이어받을 위치에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치우 측의 간섭으로 인한 갈등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공손씨는 제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며, 그의 아들 소호 금천씨가 신농씨에 이어 중원의 통치자가 되었다.
헌원은 재차 병사와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치우의 갑옷을 흉내 내어 군사들에게 갑옷을 제작하여 입혔으며 또 지남 수레를 만들었다. 치우가 천체를 관찰하고 민심을 살피니 중토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염제의 백성들이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버릴 수 없으며, 더욱이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깨달았다.
이에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힘써 싸워 이기되 추격 습격은 하지 않고 물러 나왔다. 이때 공을 세운 부장 가운데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 사기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씨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는 회(淮)·대(岱)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치우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치우가 죽었을 때 민심이 들끓었으며 이에 치우의 얼굴을 청동제기에 새기자 비로소 민심이 조용해졌다고 하였는데, 이를 보면 치우는 속임수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다.
사마천은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고 중화역사의 시작을 자기가 뜻하는 대로 바꾸어 버렸다. 5제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사기』에 첫 제왕으로 시조가 되는 사람은 공손씨라고 하여 황제(黃帝)라는 호칭을 부여해 주었다. 그리고 실제의 제왕이었던 그의 아들 소호를 아예 역사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그의 의도는 동이로 잘 알려진 태호나 그의 법을 이은 소호를 중화의 시조라고 해서는 중화가 빛나기를 바랬기 때문에, 신시에서 가장 투쟁적이고 비교적 덜 알려진 공손씨를 건국의 영웅으로 내세워 만들었던 것이다. 이같이 황제를 영웅으로 만들려다 보니 모든 기록을 조작하거나 왜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 현장을 살펴보자.
치우가 천하를 어지럽혀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황제는 제후들로부터 군사를 징집하여 치우와 탁록의 들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잡아 죽였다.
치우가 천하를 어지럽혔다고 하여 그가 일개 제후인 것처럼 썼으나, 앞에서 말했듯이 중화의 다른 여러 문헌에는 그가 구리국의 군주이자 천자임을 밝혀 놓았다. 또 탁록이란 곳에서 싸워 단번에 치우를 잡아 죽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며, 황제의 영웅화 작업을 위해 우리의 위대한 영웅을 희생물로 삼은 것이다.
사마천은 이같이 중화의 깃발을 높이 쳐 올린 댓가로 중화의 위대한 역사가로 숭앙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전쟁이란 상대를 죽이고 이겨야 하는 것이지만, 역사 기록 또한 전쟁처럼 상대를 죽이고 이겨야 진실이 되는 것일까? 하기야 일제 식민사학자라는 천황주의자들이 시조 단군과 3국의 시조들을 희생물로 삼아 우리 역사를 말살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한심한 작태가 아니겠는가?
치우의 나라는 당시 대국으로 중무장한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음에 비하여 공손씨의 나라는 소국에다 특별히 강한 군대를 가졌다는 증거가 없다. 그리고 사마천이 단 한 번으로 기록한 양측의 전쟁은『규원사화』에 의하면 10년 동안 70여 차례나 싸운 것으로 되어있다.
전쟁의 승패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많은 싸움에서 공손씨가 치우씨의 강병을 상대로 잘 버틴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황보밀은 『제왕세기』에서 공손씨가 치우와 무려 55번 싸웠다고 했으며, 낙빈기의 『금문신고』에도 이러한 사실을 지적한 것을 보면 『사기』의 사마천 기록은 날조와 다름없음을 깨닫게 된다.
공손씨의 입장에서 치우와의 싸움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보여 주는 내용이 『전국책』에도 보이는데, 그것은 공손씨가 이웃의 서융이나 연나라·진나라 등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실패한 데서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공손씨가 “무리를 이끌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일정한 거처가 없었으며, 병사로 하여금 병영을 호위하게 하였다”고 그의 어려운 처지를 『사기』 속에서도 사마천이 묘사해 놓았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치우를 단번에 잡아 죽였다는 사마천의 기록은 공상 소설이 아니라면 그의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이 모든 사실을 증거하며 사마천이 허위 기록을 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이 다름이 아닌 『사기』의 「봉선서」에 나와 있다. 그것은 진시황이 8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첫째는 하늘에게, 둘째는 땅의 신에게 제사한 뒤, 셋째로 군사의 신으로 치우를 제사했다고 하였다.
진시황은 치우로부터 2,300년 뒤의 사람인데 그동안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 영웅을 군사의 신으로 모신 것이 틀림없다. 치우가 황제에게 반역을 꾀하다 한 번 싸움에 잡혀 죽은 하찮은 제후에 불과했다면, 천하의 왕들 중에 최고라는 뜻으로 처음 황제를 일컬은 진시황이 무슨 이유로 치우씨를 제사했을까? 대답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일이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봉선서」에는 이것만이 아니다.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도 항우와의 전쟁에 나가기 전에 언제나 치우씨에게 제사를 올린 후에 출전했다고 한다. 또 한나라가 선 뒤에는 축관에게 명령하여 도읍 장안(長安)에 치우사를 세워 관리로 하여금 늘 제사케 하였다고 한다. 그가 동이의 전쟁 영웅을 사당에 모신 것은 지금 서울 동묘에 관운장을 모신 것처럼 국적을 초월한 영웅에 대한 존경의 표시일 것이다.
치우 천왕은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청구(靑丘)를 개척하여 넓혔다고 한다. 그러므로 청구는 신시의 새로운 거수국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구는 고려·조선시대에 우리나라의 별칭으로 통용된 이름인데 그 유래가 이같이 오랜 것이다. 이는 다시 한번 우리가 치우의 후손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청구는 치우 천왕 당시로부터 1,300년 뒤인 주나라 초기에 성왕이 개최한 국제 대회에 참석한 나라 중의 하나로 기록에 다시 나타난다. 또 그 1,000년 뒤인 한나라 초기에도 기록에 나타나 2,300년 동안이나 같은 이름으로 같은 곳에 존재한 나라였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예가 될 것이다.
청구의 위치는 해동 300리라 하여 중국 동부 지역임을 알 수 있는데, 『산해경』에는 중국 동남쪽의 대인국으로부터 북쪽으로 군자국 등 수 개국을 지나 청구국이 보인다고 하였다.
『사기』의 주석서에는 치우의 무덤의 높이가 7장인데 백성들이 10월에 늘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발췌=우리 고대 역사의 영웅들]
저자 황순종, 나영주
펴낸곳 시민혁명 출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