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병 국가’ 스위스, 중립국으로 인정받다 
- 위그노 전쟁 이후, 세계 최고가 된 ‘시계산업’ 
- 부가가치 높은 ‘제약, 섬유업’에 집중하다 
- 스위스 ‘금융업’ 루이 16세 덕에 성공했다? 
- 오늘날 스위스가 주목하는 ‘하이테크산업’ 

‘용병 국가’ 스위스, 중립국으로 인정받다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파리의 튈르리 궁으로 성난 민중들이 몰려왔다. 한창 프랑스혁명이 진행 중이던 때였다. 궁에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머물고 있었는데, 엄청난 군중 숫자의 겁먹은 왕의 근위병들은 서로 도망가기 바빴다.   

그러나 오직 한 부대만이 필사적으로 군 중과 맞서 싸웠다. 바로 스위스의 용병 ‘라이슬로이퍼(Reisläufer)’들이다. 서로 간의 사상자가 속출하자 프랑스 시민군들은 “퇴로를 열어줄 테리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용병 부대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고, 그 덕에 왕과 왕비는 궁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이 부대 용병 786명은 모두 전사했다. 이들은 분명 살 기회가 있었다. 그럼에도 무모한 싸움을 계속한 것이다.   

스위스 용병들은 프랑스 왕에게 충성심이 있어서 싸움을 멈추지 않은 것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그들의 조국이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격렬한 전투가 끝나고, 한 죽은 병사에게서 유서가 발견됐다. 거기엔 ‘우리가 왕과 맺은 약속을 저버리고 도망친다면 이후 우리의 후손들은 아무도 용병으로 일하지 못할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스위스는 알프스의 나라로 전 국토의 70%가 산이다. 여기에 호수까지 합치면 75%나 돼서, 경작지는 겨우 25%에 불과하다. 그마저 냉해가 심해 농사 짓기도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스위스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통했다. 장남은 그나마 작은 땅이라도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그 외 형제들은 해외로 먹고 살 길을 찾아 떠나야 했다. 그렇게 스위스에서는 용병산업이 발달하게 됐다.   

스위스는 가난했지만 군인들의 용맹함은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살았기 때문에 폐활량이 뛰어났고 체력도 좋았다. 게다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싸우느라 많은 실전 경험도 갖고 있었다. 스위스 용병들의 몸값은 아주 비쌌다. 그럼에도 모든 왕가가 급할 때면 이들을 찾았다.   

백년전쟁(1337~1453), 부르고뉴 전쟁(1474~1477), 스페인ㆍ폴란드ㆍ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00년대 초중반), 나폴레옹 전쟁(1803~1815) 등 유럽의 굵직한 전쟁 뒤에는 늘 이들이 있었다. 로마 교황이 있는 바티칸조차, 경비는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스위스 용병에게 맡기고 있다.   

이들은 절대로 고용주를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 때 루이 16세의 예에서 보듯 이들은 계약을 지키기 위해선 전멸도 감수했다. 이렇게 전개된 스위스의 역사는 스위스에게 ‘신뢰’와 ‘고가격’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키워드를 남기게 된다.  

스위스가 부국이 된 요인으로 또 하나의 중요 키워드를 꼽으면 ‘중립국’이다. 스위스는 유럽의 거의 중앙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로 주변에는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강대국들이다. 이들에 의해 스위스는 툭하면 전쟁터가 됐다.   

때문에 스위스는 오래전부터 생존을 위해 중립국을 추진해 왔고 19세기 초가 돼서야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서 다른 나라의 분쟁에 간여할 수밖에 없는 용병산업은 완전히 접게 됐다.    

백년전쟁 |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와 플랑드르 지방을 둘러싼 경제적 이해 관계가 얽혀 영국(잉글랜드)과 프랑스 간 벌어진 전쟁
부르고뉴 전쟁 |  부르고뉴 공화국의 공작과 프랑스 왕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쟁  

위그노 전쟁 이후, 세계 최고가 된 ‘시계산업’ 
나라의 주요 산업을 접게 된 스위스는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중에서도 시계, 제약, 섬유, 관광 등 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려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됐다.   

16세기 후반 프랑스에선 구교와 신교간의 종교전쟁,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 1562~1598)이 일어난다. 이때 많은 위그노, 즉 신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이주했다. 스위스는 칼뱅(Jean Calvin)과 츠빙글리(Ulrich Zwingli)의 종교개혁으로 신교가 이미 굳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넘어온 위그노들 중에는 당대 최고의 기술을 가진 시계공들이 유독 많았다. 당시 스위스엔 보석 세공업 같은 정밀 수공업이 발달해 있었는데, 검소한 삶이 강조되던 종교개혁 분위기로 인해 사람들은 대거 시계 분야로 업종을 전환했다. 세공업자들은 위그노의 장인들에게 시계 제작 기술을 배웠고, 여기에 특유의 정밀함이 더해지자 품질이 뛰어난 시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위스는 인구가 매우 적은 나라이기 때문에 무역만이 살 길이었다. 이런 면에서 시계는 스위스에 딱 들어맞는 제품이었다. 좁고 험난한 산길이 많은 나라라 부피가 크거나 무거운 제품이라면 운송이 어려워 외국에 내다 팔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시계는 작고 가벼웠다. 그럼에도 부가가치는 엄청났다. 스위스의 상인들은 큰 가방에 시계를 가득 담아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로 시계를 팔아 큰돈을 벌었다.   

용병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산업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18세기 후반에는 제네바에서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계 산업에서 일하며 연간 8만 5,000여 개의 시계를 생산하게 됐다.   

지금 초고가의 명품 시계로 세계를 휩쓰는 ‘시계의 나라’ 스위스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스위스 용병들의 몸값이 아주 비쌌음에도 모든 왕가가 이들을 찾았던 것처럼, 스위스 시계 또한 비쌌음에도 품질이 높아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이 기준은 오늘날까지도 한결같이 이어지고 있다. ‘부가가치가 높은 비싼 제품’만 파는 것이다.   

부가가치 높은 ‘제약, 섬유업’에 집중하다 
이와 비슷한 예시가 제약산업이다. 스위스의 제약산업은 염색업에서 시작됐다. 알프스에서 나는 여러 식물을 이용해 천에 갖가지 색을 물들이던 단순한 일이었다. 그러다 식물을 찾아 나서던 스위스인들은 점차 알프스 산자락에 진기한 약초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들은 약초를 알약으로 만들었고, 가방에 담아 알프스에 봉우리를 넘어 유럽 전역에 팔았다. 약초는 시계보다도 가벼웠고, 부가가치도 높아서 가방 하나만으로도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제약업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오늘날 스위스는 세계 신약 발매 1위 기업인 노바티스(Novartis), 항암치료제 세계 1위 기업인 로슈(Roche) 같은 세계적인 제약회사를 갖게 됐다.  

스위스를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 시켜준 일등공신은 섬유산업이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방적기를 들여오면서 스위스는 본격적인 섬유산업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이 떨어지자 더 이상 기계를 들여올 수 없게 됐고, 섬유산업은 일순간 위기를 맞는 듯 했다.   

하지만 스위스는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다. 방적기를 직접 개발한 것은 물론 사상 최초로 디젤엔진을 달아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게 만들었다. 이 덕에 스위스의 섬유산업은 세계 최고가 됐다. 스위스산 방적기계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1900년엔 전체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섬유산업에 종사할 정도였다. 섬유산업 발전에는 용병 출신들이 큰 몫을 차지했다. 용병이 유럽 각국에 파견되다보니 각국 시장 사정에 밝았고 이들을 신뢰하는 인맥들도 많아 쉽게 판로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약소국이었을 때 스위스의 지리적 위치는 독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무역에 눈뜬 스위스에겐 교통의 요충지가 오히려 큰 장점이 됐다. 스위스는 알프스 너머의 나라들과 교역을 늘리기 위해 19세기 초에는 도로건설에 주력했고 19세기 중반에는 철도망도 대폭 늘렸다.   

이때 철도망을 늘린 덕에 전혀 기대치 않았던 또 다른 산업의 기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바로 오늘날까지 스위스 경제에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관광산업이다. 당시 유럽의 부유층들은 해외여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19세기 말 즈음에는 35만 명의 관광객이 스위스를 찾아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대륙봉쇄령 |  트라팔가 해전(1805)에서 영국에게 패배한 나폴레옹이 영국에 대해 단행한 경제적 봉쇄 정책. 유럽 대륙 국가들의 영국과의 통상 금지, 영국 선박의 대륙 출입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륙봉쇄령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산업의 기초가 튼튼한 영국보다 영국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던 대륙 국가들에게 오히려 고통을 안겨 주었다.   

스위스 ‘금융업’ 루이 16세 덕에 성공했다? 
시계와 섬유, 제약과 관광 등에서 자본을 축적하게 된 스위스는 이제 금융업으로 손을 뻗쳤다. 그리고 은행 사업의 성공은 알프스에 갇힌 빈국 스위스를 일약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국가로 만들어주었다.   

스위스 금융업 역시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이 이주해 오면서 시작됐다. 17세기 후반 루이 16세는 신교의 자유를 허용한 낭트칙령을 철회(1685)했고, 이로 인해 제2차 위그노 탈출이 벌어졌다. 이때 스위스로 온 위그노들 중에선 신흥재력가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주로 제네바에서 고리대금업을 했다.   

그런데 사치를 일삼던 루이 16세는 공교롭게도 이들에게 손을 벌리게 됐다. 그런데 그는 돈을 빌리면서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자신이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꼭 비밀에 부쳐 달라는 것이다.   

본인이 내쫓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이 창피했던 것이다. 스위스 은행이라고 하면 예금주와 돈의 출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비밀주의로 유명하다. 이것이 바로 루이 16세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스위스의 금융업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서게 됐다. 이것은 스위스가 중립국 지위라는 점과 스위스라면 자신들의 돈을 끝까지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자들은 전쟁 발발 이후 자신들의 돈을 맡길 안전한 나라를 찾았다. 독일이든 영국이든 유럽 국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전쟁에 지는 순간, 돈이 휴지조각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눈 씻고 찾아봐도 답은 스위스 밖에 없었다. 그러자 스위스 은행으로 어마어마한 돈이 몰려 들었다.   

전쟁에 반드시 필요한 석유를 대는 아랍에서도 결제 수단으로 스위스 프랑을 요구했다. 허구한 날 침략을 당하고, 용병 외엔 먹고 살길이 없던 이 가난한 나라의 돈이 일약 기축통화가 된 것이다.    

한편, 스위스 은행에 돈을 맡긴 유럽의 부자들은 1,2차 세계대전에서 모두 살아남았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끝까지 찾고 싶어 했던 독일 부자들이 맡긴 돈도 고스란히 스위스 은행의 소유가 됐을 것이다.   

현금 많기로 소문난 유태인의 돈은 말할 것도 없다. 나중에 미국의 압력으로 유태인 후손들에게 피해보상금을 조금 주기는 했다. 어쨌든 스위스 금융업은 스위스 경제를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세계대전을 통해 전쟁의 리스크가 적은 스위스의 안정성이 부각되자 수많은 국제기구들도 스위스에 잇따라 자리 잡았다. 세계무역기구(WTO), 국제적십자사(IRC), 세계보건기구(WHO), 국제노동기구(ILO), 국제결제은행(BIS) 등 30여 개의 주요 국제기구와 250여개의 NGO 단체가 스위스에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국제축구연맹(FIFA)도 스위스에 본부가 있다. 또한 구글 해외기술센터를 포함한 5,000여 개의 다국적 기업이 스위스에 소재지를 두고 있어 이 나라의 부를 더해주고 있다. 

기축통화(基軸通貨, key currency) |  국제간의 결제나 금융거래의 기본이 되는 통화  

오늘날 스위스가 주목하는 ‘하이테크산업’ 
이처럼 스위스는 영세 중립국이 되면서 오랜 세월 전쟁을 피한 덕에 지속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스위스의 산업 흐름을 보면 또 하나의 일관성이 있다. 바로 ‘역량 집중화’이다. 스위스 인구는 870만 명 정도에, 영토도 남한의 40%에 불과하다.   

이 작은 나라에서 모든 분야의 산업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스위스는 특정 분야의 산업에 올인해 왔다. 온 역량을 집중해 특정 산업의 수준을 최고로 끌어올린 다음, 물건을 최대한 비싸게 파는 것, 이게 스위스가 지금까지 200여 년 간 반복해 온 일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스위스는 어떤 분야의 사업에 집중하고 있을까. 바로 하이테크(High-Tech) 산업이다. 하이테크는 전자·신소재·바이오·컴퓨터·정보통신 등 첨단 기술을 핵심으로 한 고도의 지식 집약적 산업을 말한다.   

스위스는 시계, 섬유, 제약 등에서 보듯 ‘이공계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스위스의 대학진학률은 20% 내외이지만, 그 가운데 다수가 이공계열을 차지한다. 스위스 정부는 매년 1조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예산을 최첨단 연구시설과 연구 활동에 지원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자국 내 상위 1% 이내의 수재들 대부분이 이공계 대학으로 진학한다. 특히 국적 취득이 까다로운 스위스도 우수한 이공계열 유학생들에게는 국적을 주고 스위스 체류를 독려할 정도다.   

이공계열과 친숙한 스위스 국민들은 시계에서 시작된 정밀기술을 바탕으로 의료기기, 선박터빈, 발전설비, 정밀 측정기는 물론 우주비행선까지 최첨단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 제품들은 그들의 전략처럼 매우 고가임에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늘 그래 왔듯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만 팔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용병의 목숨 값으로 먹고 살던 나라를 오늘날 1인당 국내총생산(GDP) 9만 4,700달러에 이르는 세계 최고의 부국으로 만들었다.  

- 이 기사는 '나침반 36.5도' [세계사로 경제 읽기]에 실린 내용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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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진 기사 URL: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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